눈이 감긴다. 땅이 흔들린다.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다. 아주 긴 시간, 한국을 떠난 지 24시간 만에 도착했다. 루르드 도착시간은 17시였으나 한국으로 따지면 자정이었다.
비행기는 8시 제시간에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려 좌석을 최대한 앞으로 선택했고 배낭도 부치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에서 입국심사도 마친 터라 누구보다 먼저 에르에르 (RER/Reseau Express Regional) 티켓 머신을 찾기만 하면 된다. 도와준다는 핑계로 잔돈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다니 시간이 없는 나는 혼자서 표를 끊어야 했다.
걱정과는 달리 파리에 도착한 지 15분 만에 티켓 머신까지 무사히 찾아갔지만 이미 줄이 제법 길었다. 동전으로 티켓 값인 10€를 준비해 갔으나 0.50€까지만 사용이 가능한 것을 모르고 자투리 동전까지 넣어서 금액을 맞추었지만 동전을 뱉어내지도 않고 계속 금액이 모자란다고 표시되어 시간을 지체했다. 결국 1€를 더 넣으니 티켓이 나왔고 자투리 동전들도 몽땅 뱉어냈다.
Paris par train 표지판을 따라가니 탑승 게이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8시 반쯤 에르에르에 오르고 보니 악취와 함께 지저분한 좌석이 눈에 들어왔다. 밤에는 치안이 좋지 않다더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이 가능했다. 각종 오물로 범벅이 된 좌석에 차마 않을 수는 없었다. 한 시간 동안 배낭을 짊어진 채로 서 있을 수도 없어서 배낭만 간신히 팔걸이에 내려놓았다.
to Robinson/ to Saint Remy les Chevreuse를 타고 45분쯤 후 Saint Michel Notre Dame 역 하차, to Mairie de Montrouge M4로 갈아타고 25분을 달려 몽빠르나스 Montparnasse Bienvenue 메트로 역에 도착했다.
메트로 역에서 Gare Montparnasse 몽빠르나스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지만 지하에서 괜히 헤맬까 봐 일단 지상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방향을 알 수가 없어 조금 헤맸고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메트로 역에서 기차역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마음은 아슬했지만 다행히 9시 40분쯤 기차역에 도착했다. 아직 플랫폼이 정해지지 않아 기다리는데 출발 시간이 21분으로 5분간 앞당겨져 있었다. 나중에 보니 출발시간 변동을 알리는 메일이 와있었다. 그나마 일찍 도착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기차를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몰라서 다행인 건가? 애초에 두 시간 반 만에 비행기에서 기차까지는 무리였다.
8시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이었고 한 시간 거리의 몽빠르나스 기차역에서 10시 26분 TGV를 타겠다는 생각부터가 애초에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비행기가 연착되거나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한국에서 예매한 TGV 티켓은 날아가고 이후 일정이 엉망 될 상황이었다.
앞당겨진 시간을 미리 알았더라면 오는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이고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어느 골목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난 무사히 TGV에 올랐고 깨끗한 실내에 기분이 좋아졌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씨 좋은 승무원에게 받아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다들 왜 안 먹는 걸까?
그런데 몇 시간쯤 지났을 때, 발목 뒤 종아리 부근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처음엔 기차에서 난방을 튼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뒷사람이 신발을 벗고 앞까지 발을 쭉 뻗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의자에 드러눕지 않고서야 뒷사람의 발이 내 의자 아래까지 닿을 리는 없었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주변은 여전히 평화로운데 나만 잔뜩 겁을 먹고 긴장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학창 시절 만원 버스에서 항상 맞닥뜨렸던 각종 변태들에게 제대로 저항 한번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어른이 되어서도 자책을 하곤 했다.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른이 된 지금, 세상이 많이 변한 지금, 만약 똑같은 일을 겪는다면 이젠 큰소리로 주변에 도움을 청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미 나는 뒤를 돌아보기는커녕 내 다리도 내려다보지 못할 정도의 공포에 휩싸여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나를 먼저 달래야 했다. 뒷사람이 모르고 한 행동일지도 모르니 일단 얘길 해보자. 근데 뭐라고 하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다리를 조금 움직이자 그것이 움찔거리더니 내 종아리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이건 모르고 하는 행동이 아니잖아,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이제 국제 변태를 만났나?
몸이 굳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수줍은 고등학생도 아니고 세상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던 내가 이런 일에 또 몸이 굳어버리다니. 한참을 머뭇거리다 움직임이 잦아들 때 간신히 용기를 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일까? 손일까? 그런데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다리에 기대 자고 있었다. 강아지만큼 큰 고양이는 처음이었다.
그제야 난 긴장이 풀렸고 어이없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났다. 근데 이렇게 큰 고양이가 왜 기차에 있는 거지? 한참 후, 저만치에 앉아있는 어느 여행객이 내리면서 고양이를 찾는다.
다시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 루르드에 가까워질 무렵, 까미노 프랑스 길을 걸었다는 한 프랑스 여인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착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달리는가 싶더니 30분 정도 늦게 루르드에 도착했다.
Lourdes는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에 있는 오트피레네 주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자 코뮌이다. 루르드는 원래 피레네 산맥에 있는 작은 시장 마을이었다. 그 당시 가장 눈에 띄었던 특징은 바위 절벽 위에 있는 마을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요새화된 성채였다.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프랑스의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에서 14살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18차례에 걸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다. 베르나데트는 성모님의 모습을 흰옷에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를 감쌌으며 팔에는 묵주가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성모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베르나데트의 물음에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 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시고, "회개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반포한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도 하다.
아홉 번째 발현 때는 "샘에 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라."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때 베르나데트가 파낸 샘물이 아직도 메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기적의 샘물, 루르드의 물이다. 루르드는 질병의 치유를 위해 찾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선사하고, 동시에 회개와 보속을 통한 내적 치유를 만들어내는 순례지이기도 하다.
1858년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루르드의 성모가 발현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결과, 루르드는 매우 중요한 가톨릭의 성지 순례 장소 가운데 한 곳으로 탈바꿈하였다. 오늘날 루르드에는 약 1만 5천 명이 살고 있지만, 매년 약 5백만 명의 순례자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약 270채의 숙소가 있는 루르드는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숙소를 보유한 도시이다. 이곳에는 타르브에루르드 교구좌가 자리 잡고 있다.
TGV가 연착되어서인지 마중 나온다던 호텔 직원 모니카는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루르드 역에서 배회하며 기다리니 저 멀리 누군가를 찾는 듯한 프랑스 인이 보여서 혹시 하고 다가가니 맞단다. 모니카 대신 마중 나온 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호텔 주인아저씨 로핀 씨였다. 차를 타고 몇 분 내 쁠레장스 호텔에 도착했는데 1인실과 2인실을 보여주며 마음에 드는 방으로 고르란다. 1인실은 크기도 맘에 들었고 창밖 풍경도 좋았지만 비데 같은 물건이 침대 옆에 떡하니 있었다. 그나마 칸막이라도 있는 2인실을 선택했다. 방안에 욕실 대신 세면대가 딸려있는 오래된 호텔이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6식 포함 2박 86€를 지불하려니까 모니카가 1박에 45€라고 했다. 수녀님에게 전해 들은 숙박비는 1박 43€라고 말하니 알겠단다. 그런데 100€를 주니 10€만 돌려준다. 다시 얘길 해서 잔돈까지 다 받아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짐을 풀 시간도 없이 메일로만 인사를 나누었던 예수 성심 시녀회 수녀님이 오셨다. 성체 강복 시간에 늦었다며 빨리 나가자는데 거의 이틀 동안 씻지 못한 상태였다. 그 상태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10분만 양해를 구하고 샤워하고 따라나섰다. 수녀님의 차를 타고 성지로 갔는데 너무 서두르셔서 조금 불안했지만 이내 루르드 성지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어느 지하 성당으로 따라갔는데 아슬하니 성체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날씨에 패딩을 들고 계셔서 왜 그런가 했는데 요즘 이상 기온으로 루르드가 갑자기 추워졌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은 따뜻한 편이라니 다행이다. 수녀님의 안내로 동굴 성당 가는 길에 말로만 듣던 기적의 샘물을 마시고 로사리오 성당에서 미사도 참석했다. 내일은 주요 성지를 안내할 한국 그룹이 오는데 나도 설명을 듣고 싶으면 그 팀에 합류해도 좋다고 하셨고 나를 호텔에 다시 데려다주고 돌아가셨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내려갔는데 땅이 흔들리고 어지러웠다. 순간 지진이 난 줄 알고 테이블을 붙들고 서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다. 혹시 거대한 동굴 위에 세워진 마을인가? 나도 며칠 지내다 보면 저들처럼 평온해지려나? 자리에 앉았지만 땅은 계속 흔들렸고 한참 후에야 멈추었다. 그런데 땅이 흔들린 게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지진이 난 거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혼자서 성지를 찾아가겠다고 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란다. 호텔이 언덕 위에 있어서 차를 타면 골목을 돌아서 내려가야 하지만 걸어가면 언덕 끝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바로 내려갈 수 있단다. 내려가니 차를 타고 갈 때 보았던 익숙한 골목이 나왔고 그 길을 따라가니 저 멀리 성지 입구가 보였다. 혼자서 루르드 성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금방 날이 어두워졌고 어느새 밤 10시가 되었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피곤해서 바로 잠들었다.
Paris→Lourdes, France
Paris Montparnasse 10:21~16:31 Lourdes
Airport~Montparnasse RER -10.00€ Montparnasse~Lourdes TGV -25.00€ Plaisance Hotel -43.00€ Lourdes Misa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