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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8

Saint Jean Pied de Port→Roncesvalles

by 안녕
Day 6.
Monday, June 1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스페인의 아침식사, 데사유노가 제공된다고 해서 일단 나갔다. 식빵이나 바게트를 기대했는데 토스트 모양의 과자, 가예따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마친 탓에 이마저도 이미 동이 나있었다. 한국에서 챙겨간 믹스커피를 끓여서 커피통에 담아서 들어왔다. 어제 뭉친 멤버 그대로 7시쯤 같이 출발하기로 했기에 아직 이른 시간이라 다시 침대에 누웠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떠나고 알베르게가 한가해졌을 때 나도 일어나서 준비했다. 우리 팀 모두가 준비를 끝냈고 약속한 7시에 다 같이 모여서 출발하려는데 Y가 뒤늦게 신호가 왔다며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고 가버렸다. 조금 지체되었지만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다.




알베르게가 있는 Rue de la Citadelle 골목을 내려오면 199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된 Porte de Saint Jacque, 야고보의 문이 나오는데 길을 안내하는 첫 번째 금빛 표식이 길에 박혀있었다. 다리를 건너 스페인 문인 Porte d’Espagne 통과한 후에는 Chemin de Saint Jacques 표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아직 프랑스에 있기 때문에 스페인 식 까미노 표식인 노랑 화살표보다는 하양과 빨강의 프랑스 식 표식이 눈에 띈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도 프랑스에서는 롱스보(Ronceveaux)라 불리고 스페인 국경을 넘어갈 때까지는 니베(Nive) 강이 아니라 니브(Nive) 강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루트가 있다. 첫 번째는 Ruta de los Puertos de Cize로 산티아고로 가는 도보 순례자들이 지나는 일반적인 루트로, 매우 힘들지만 웅장한 피레네 산맥의 풍광과 울창한 활엽수림이 길을 따라 펼쳐져 있다. 이 루트를 지나기 위해서는 해발 1410m의 Col de Lepoeder를 넘어야 한다. 두 번째 길은 자전거 순례자들이나 기상이 좋지 않은 시기에 도보로 이용하는 Via Valcarlos다. 발까를로스를 거치는 이 길은 시세 언덕길보다는 조금 길지만 길은 편하다. 경치가 조금 부족하지만 이 루트 역시 피레네 산맥의 계곡길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샤를마뉴의 계곡(Valle de Carlomagno)을 지나게 되며 해발 1,057m의 Puerto de Ibañeta를 넘어야 한다.

시세 언덕길은 날씨가 좋지 않을 때나 오리손의 알베르게가 문을 열지 않는 겨울철에는 비아 발까르로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두 루트 모두 주의해야 한다. 산속에서의 날씨는 빠르게 변할 수 있으며 안개로 인해 앞을 보기 힘들 수도 있다. 봄과 가을에도 눈을 만날 수 있고 추위와 강풍, 발을 떼기 힘든 진창을 극복해야 하는 힘든 코스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우린 당연한 듯 시세로 간다. Le Puy에서부터 걸어왔다는 한 일본인을 만나 걸어온 얘기를 들으며 걷는데 아저씨가 불쑥 일어로 대화에 끼어드신다. 선원이라 일어를 할 줄 아신다고 했다. 두 분의 연배가 비슷하니 나보다 더 잘 통할 듯 싶어 난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사실 이야기하면서도 잘 걷는 두 아저씨 걸음을 맞추기에 벅차던 중이었다. Y에게도 먼저 가라 했으나 앞서면서 중간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할 때부터 자욱하던 안개로 인해 숨 쉬기가 힘들었는데 끊임없이 오르막이 이어지고 있어서 더 힘들었다. 길이 험난한 것도 아니고 주변 풍경 또한 예뻤지만 배낭은 무겁고 다리는 터질 것 같아 계속 뒤처지고 있었다. 꼭 필요하다고 하여 준비해 온 등산용 스틱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겠고 쓰는 법을 모르니 무릎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양손을 묶고 있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고 싶어도 스틱을 한 손으로 모으고 폰을 꺼내야 해서 멈출 수밖에 없는데 멈추는 시간만큼 지체되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마라. 꾸준히, 멈추지 마라.' 이 원칙만 지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까미노였다. 그런데 아름다운 피레네 산맥 풍경을 보며 사진을 안 찍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시로 멈추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오리손으로 가는 시세 언덕길은 생미셀로 가는 왼쪽 길을 두고 D-428 도로에서 시작한다. 처음 Irouleya를 향해서 오르는 길은 가파른 비탈길로 시작된다. 이후 피레네 특유의 그림 같은 집들과 농장이 언덕에 펼쳐지며 에뜨체베스떼아 (Etchebestea)와 에레꿀루스 (Erreculus) 사이에 있는 100년이 넘어 보이는 밤나무에서부터 운또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숙박이 가능한 알베르게를 만나게 된다. 운또에는 방향 표지판과 함께 물통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이 있다.

운또를 지나 어느 오르막 길에서 난간을 잡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며 인사한다. 부엔 까미노! 누군가 사탕 몇 개를 건네주어 손에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으로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껍질과 남은 사탕을 주머니에 넣다가 사탕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나 보다. 그때 한 노랑머리 여자가 지나가며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질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분명 기분 나쁜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서 있으니 옆에서 Y가 대신 얘기해 준다. 내가 사탕을 떨어뜨린 게 아니라 사탕 껍질을 바닥에 버린 걸로 오해하고 있다고. 아니 왜 내가 쓰레기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운또를 지나 걷다 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그대로 직진을 하면 포장도로와 산길은 까미노 테이블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왼쪽의 좁은 산길이 지름길이다. 길은 여전히 경사가 급하나 주위의 풍경은 피레네 산맥 특유의 완만한 구릉이 주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어 오래지 않아서 목초 사이로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 이어지고 오리손에 도착하게 된다. 오리손에는 옛날에 론세스바예스의 부속 수도원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0시 오리손에 도착했다. 오리손 알베르게는 산속에 떨어진 작은 숙소이므로 예약이 필수이며 만약 예약을 못했다면 생장 삐에드뽀르의 순례자 사무소에서 예약을 부탁해야 한다. 바르가 있는 본채 외에도 길 아래에 별채가 있는데 성수기를 제외하고 만실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동양인은 별채로 내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기에 가급적이면 론세스바예스로 이동하길 권한다. 길가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화장지는 없으므로 미리 챙겨야 한다. 일행인 두 사람을 따라가기엔 너무 벅찼다. 아저씨가 물과 간식이 들어있는 간식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있었는데 도중에 필요할까 봐 무리해서 따라갔더니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예전 소백산 등산할 때가 기억이 났다. 처음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는데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한참을 마냥 뒤처져 갔었다. 그러다 누군가 맨 앞에서 걸어보라며 조언을 해주었다. 그 말을 따라 그렇게 맨 앞에서 걷기 시작했더니 많이 힘들지도 않았고 남들보다 훨씬 더 앞서갔던 기억이 났다.

지금도 그랬다.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걷고 싶은데 일행을 놓칠까 봐 불안한 마음에 조급해진 거였다. 민폐가 되기 싫어 먼저 가라고 해도 계속 기다려주시니 난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괜찮다고 기다려 주었지만 자기 페이스대로 못 걷다 보면 언젠가는 짜증이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시라고, 성 모자상이 있는 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보내드렸다.

혼자가 되니 한결 맘이 편해졌다. 평화로운 목장 길을 따라 그렇게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걸었다. 두 시간마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는데 배낭은 메고 있을 때보다 내려놓을 때와 다시 짊어질 때 고통이 더 따랐다. 등산화를 벗고 양말까지 벗어서 발의 열기를 빼주다 보면 쉬는 시간보다 그 과정이 더 길어지게 되어 정작 쉬는 시간은 몇 분 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발의 열기는 꼭 식혀주어야 한다고 해서 따르고는 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잠깐 벗어두었다고 두꺼운 양말이 마르지도 않을뿐더러 양말을 다시 신으면 축축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나마 어깨의 통증이라도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12시쯤 바위 위에 알록달록하게 치장을 한 비아꼬레 성 모자상이 보였다. 피레네 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이 지점에서는 맑은 날 프랑스 루트의 시작 지점들을 바라볼 수 있다. 기념 촬영을 하기에 좋다지만 오늘은 안개가 자욱할 뿐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 모자상 앞에서 묵주 기도를 바치며 앞으로의 여정과 평안함을 간구한다.

비아꼬레 성 모자상이 있는 곳에서 두 사람과 합류했는데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온통 똥밭이다. 주변에 목장이 있으면 어디나 이랬다.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는데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사과를 꺼내 나누어 드리니 아저씨도 사과를 꺼내신다. 내가 챙기길래 괜찮은 줄 알고 몽땅 챙겨 오셨다는데 괜히 써니 하우스에 미안해졌다. Y는 점심을 준비해 오지 않았대서 바게트를 나누어 주고 난 사과를 먹었다. 너무 시원하고 달콤했다. 여기서도 30분쯤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넓은 개활지이기 때문에 적들이 기습을 하기 어렵고 다른 루트보다 빨리 이바녜따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전략적 요구에 따라서 1807년 나폴레옹의 부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당시 이 루트를 이용했다고 하여 이 루트를 나폴레옹 루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이어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까를로스 루트의 아르네기(Arnegi)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온다. 계속 가다 보면 생장에서부터 이어져오던 아스팔트 포장길이 사라지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으로 이어지는 언덕이 나타난다.

Saint Jean Pied de Port~Roncesvalles 25.7km 안내판이 보였다. 공식적인 거리는 통일했으면 좋겠다. 같은 길을 걸어도 사람마다 거리는 다 달랐다. 날씨가 개이니 풍경마저 달라 보이더니 산티아고까지 765km가 남았다는 첫 번째 까미노 싸인이 보였다.

14시 20분쯤 서사시 La Chancon de Roland으로 유명한 롤랑의 샘에 도착했다. 식수라기엔 한눈에도 상태가 그랬다. 수도꼭지를 통해 물이 나오곤 있지만 언덕 위로 올라가 보니 실개천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그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게다가 샘 반대쪽에는 식수 불가 안내판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수도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붙어있다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론세스바예스까지 8.2km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허름한 휴식처 같은 Col de Bentarte에 도착하니 Y 혼자 기다리고 있었는데 의외로 빨리 왔다며 반겨준다. 내 페이스대로 걸으니 마음이 편해서 더 잘 걷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못 따라오고 중도에 포기할까 봐 걱정했다는데 이제 보니 안심해도 되겠단다. 아까워서라도 포기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시는 듯, 저 끈기 있는 여자랍니다. 아저씨는 먼저 출발하셨단다. 내 걸음이 빨라진 것 같다고 같이 걷겠다는데 왠지 다시 불안하다. 롤랑의 샘에서 담아 온 물을 마시고 있길래 근처에 식수 불가 안내판이 나뒹굴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니 바로 버린다.

어느덧 국경을 넘어섰고 드디어 스페인 나바라에 들어섰다.




NAVARA
나바라만큼 풍성한 기후, 경관, 문화를 지니고 다채로운 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곳은 없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만 달리면 피레네 계곡의 습기와 바스크 지방의 구멍 세 개짜리 피리인 치스뚜 소리가 들리고, 바스크 지방의 민요인 소르시꼬가 울려 퍼지는 바스크 지역부터 가죽 피리 소리에 맞춰 남녀노소가 춤을 추는 중부 나바라 지방과 호따 춤의 본고장인 에브로 강 유역을 모두 지날 수 있다.

나바라는 9세기부터 16세기까지 독립 왕국이었으므로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기념물들이 많다. 그리고 여러 순례길이 나바라를 지나면서 한 개의 길로 합쳐진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오래된 왕국의 아름다운 예술적 유물들도 많다. 이 중 론세스바예스의 왕실 부속 성당, 나바라 박물관, 빰쁘로나 대성당, 올리떼 성, 나바라 데 에스떼야 왕궁, 레이레 수도원, 이라체 수도원, 이란수 수도원, 뿌엔떼 라 레이나 다리 등이 있다. 나바라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거나 시골 관광, 생태 관광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피레네 지역의 높은 산과 왕실 소유림, 이라띠의 숲 같은 울창한 숲, 바르데나 레알레스의 건조한 지역, 에브로 강 연안의 과수원, 띠에라 에스떼야 산과 중부 나바라의 곡창지대 등 나바라에는 압축된 공간에 다양한 경치와 자연 서식지가 있다.

또한 나바라는 아슬아슬한 스포츠를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등산, 암벽 등반을 할 수 있고 예사, 아요스 호수에서 수중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다. 또는 전통적인 스포츠를 즐길 장소도 많다. 축제에 관심이 있다면 란츠, 이뚜렌, 수비에따 등에서 열리는 지방 카니발 같은 오래된 축제를 즐기면 된다. 빰쁘로나에선 엔시에로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산 페르민 축제(Fiestas de San Fermin)가 열린다. 전통적인 카니발과 세계적인 축제의 특징을 모두 갖춘 행사로는 ‘마녀들의 밤’(Noche de las Brujas) 같은 축제가 있다.

나바라의 이러한 장점들은 훌륭한 도로망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다. 적절한 대중교통과 양질의 호텔, 캠핑장, 호스텔, 전원주택도 갖춰져 있다. 게다가 D.O. Navara 같은 이 지방 고유의 와인, 치즈, 고기, 산악 지방에서 만든 소시지, 칸타브리아해 연안에서 잡히는 생선, 뚜델라의 알카초파와 삐끼요의 고추 같은 에브로 강 연안의 야채, 과자류, 그리고 유명한 Pacharán, 아니스와 자두로 만든 리큐르 때문에 나바라 식도락 순례는 훌륭해진다.




스틱은 치우고 젤리를 먹으며 쉬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피레네에서 가장 높다는 뢰페데르 정상에 오르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아니 길은 의외로 평탄했고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길은 햇빛을 막아주어 시원했다. 그러나 햇빛이 들어오지 못한 숲길은 발목까지 빠지는 진창길이었고 등산화에 진흙이 들러붙어 걸을 때마다 신발은 거대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날벌레의 습격이 이어져 무거운 배낭에, 지칠 대로 지친 무거운 두 발로 이 길을 초인적인 힘으로 내달려야 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드디어 숲길을 벗어났지만 얼굴은 여기저기 울긋불긋 해졌다.

16시 직전 뢰페데르 정상에 도착했지만 정상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다시 선택해야 했다. 보스께 데 이라띠(Bosque de Irati)를 통과하는 길은 짧지만 급한 경사 길이고 뿌에르또 데 이바녜따(Puerto de Ibañeta)를 통과하는 길은 멀지만 완만한 경사 길이다. 이 중에서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하다 안전하게 이바녜따로 가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내려섰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길로 가고 있었지만 가다 보니 그 길은 이라띠 숲으로 가는 길임을 곧 깨닫게 되었다.

안개가 다시 자욱해지더니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발이 계속 붓고 있었다. 내리막에선 체중이 앞으로 쏠리니 양쪽 발톱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루르드에서 그룹 쫓아다닐 때 이미 무리가 온 발톱이었는데 다시 힘이 가해지자 부어오르고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이 계속되자 너무 힘들어서 결국 슬리퍼로 바꿔 신었다. 실내에서 신으려고 챙겨 온 것이지만 아주 얇은 욕실용 슬리퍼였다. 그래도 발톱이 자유로워지니 살 것 같았다. 일단 발톱부터 살려야 했다. 집에 갈 때까지는 제발 빠지지 말자. 붙어만 있어라. 난간 없는 낭떠러지 길이 이어져 바람이라도 불면 어찌 될지 모르는 위험한 길을 지나야 했다.

길 가에 재킷 하나가 떨어져 있는데 누군가 흘리고 갔나 보다. 오늘은 대부분 론세스바예스에서 묵을 테니 주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Y가 챙겨 들었다. 한참 가다 보니 발까르로스 루트의 정상인 이바녜따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 길과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저 멀리 나바라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롤랑의 기념비와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따 소성당이 보였다.




Roncesvalles (953M)는 스페인의 오래된 바닥의 포장 돌과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백 살은 넘은 듯한 웅장한 나무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 이 순례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증인이 되어준다. 이 길과 그 길을 지난 사람들이 현재까지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전설의 기원을 밝혀주고 있다. 이 오래된 건물들은 탐욕 때문에 들어온 침략자의 군대에게나 믿음으로 길을 찾아온 순례자 모두를 위한 휴식 장소였다. 또한 피레네 산맥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이 역사적인 장소에 또 다른 특별한 매력을 선사한다. 겨울에는 흰 눈으로 덮여 있는 피레네의 산맥의 봉우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초록색 초원이 가축들에게 먹을 양식을 제공한다면 여러 건축물과 시설은 프랑스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영토로 발을 들여놓은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 순례자들을 편안히 쉬게 해주는 몇 개의 아름다운 성당과 샤를마뉴, 롤랑, 론세스바예스 전투와 관련된 역사가 있는 마을로 이곳은 역사, 예술, 문화, 전설이 모두 갖춰져 순례자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다.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
산따 마리아 왕립 성당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초기의 건물이다. 이곳에는 고딕식 성모 마리아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성직자 회의실엔 강건왕 산초 7세의 고딕 양식 무덤이 있고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Las Navas de Tolosa)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일부도 있다. 회랑은 17세기 양식이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원래의 건물 자리에 13세기에 재건축된 것으로 원래의 건물은 아라곤과 나바라의 왕인 전투왕 알폰소 1세의 소망에 따라 빰쁘로나의 대주교 돈 산초 데 라로사의 재임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다. 아름다운 작품들은 산초 엘 푸에르떼의 건축가들이 가져왔고 산초 왕의 후계자들이 마무리했다. 고딕 회랑과 회의실, 다른 부속 건물 등이 있으나 세월의 무게 때문에 부분적으로 무너졌다. 1445년에 화재가 일어나 성당 건물이 훼손되었으며 1600년에는 지붕에 내려앉은 눈의 무게 때문에 남쪽 회랑과 성전의 지하층이 무너졌으나 1615년 건축가 돈 후안 데 아라네기에 의해 재건되었다.

Claustro de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
왕실 부속 성당 산따 마리아의 17세기에 지어진 회랑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회랑이 1600년에 눈의 무게 때문에 무너지고 나서 다시 지은 것이다. 버팀벽이 있는 견고한 아치는 붕괴 이후 보강을 위해 설치되었다. 회랑의 동쪽 복도엔 방어용으로 지은 수수한 산 마르띤 탑이 솟아 있다. 탑 내부엔 산초 엘 푸에르떼 왕의 영묘와 13세기에 만들어진 왕의 와상이 있다.

Capilla del Sancti Spiritus
성령의 소성당은 샤를마뉴의 헛간(Silo de Carlomagno) 으로도 불리는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산따 마리아 왕립 성당 남쪽, 산띠아고 소성당 옆에 있는 이 건물은 론세스바예스에서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이 두란다르떼(Durandarte)로 내려친 바위 위에 지었다고 한다. 17세기 초반에 반원 아치의 현관문이 추가되었고 론세스바예스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Museo de la Colegiata
론세스바예스 박물관으로도 불리는 꼴레히아따 박물관에는 꼴레히아따에서 오랜 세월 동안 모은 예술적인 보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여러 시대의 고서, 유골함, 성합, 주교장, 궤, 조각, 회화 수집품들이 있다. 특히 샤를마뉴의 체스 (Ajedrez de Carlomagno)라고 불리는 금, 은, 칠보로 만든 고딕식 유골함이 있는데 전설적인 샤를마뉴의 체스판은 은과 칠보로 제작되었으며 화려한 색에 반투명한 고딕식 유물이다. 실제 체스판과는 달리 63칸으로 나뉘어 있다. Miramamolín 이라고 부르는 나바라 주의 문장 등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금은 세공, 자수 장식, 패널화, 캔버스화, 동판화, 목조 조각, 칠보 등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회화 작품으로는 르네상스의 거장 루이스 모라레스(Luis Morales)가 그린 성 가족 (La Sagrada Familia)이 있다. 또한 12세기에 은과 보석 장식으로 장정된 복음서는 나바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미사용 복음서이다.

Capilla San Agustín
14세기에 비구리아 수사(Prior Viguria)가 만든 산 아구스띤 소성당에는 나무못으로 조여진 높은 궁륭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수사의 비문은 성당 바닥의 격자에서 볼 수 있다. 1154년에 태어나 1234년에 사망한 산초 엘 푸에르떼의 영묘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꼴레히아따에 있던 산초 왕의 중세 묘지는 1622년에 파괴되었으나 왕의 와상은 왕의 대퇴부가 60cm라고 측정하여 기록한 필사본 덕택에 복구되었다. 이 조각의 다리는 십자군, 기사단 군인의 묘지에서와 같이 서로 포개져 있다. 교회가 정식으로 십자군 전쟁으로 인정했던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에 참가했던 산초 왕이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사슬이 보관되어 있으며 사슬은 나바라의 문장을 장식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Capilla San Salvador de Ibañeta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따 소성당은 11세기 수도원 터 위에 세워진 현대적 소성당으로 이곳에서 롤랑이 전사했었다고 하며 안개 낀 날에 순례자를 인도하는 유명한 론세스바예스의 종을 롤랑이 못 박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의 소성당은 1965년에 완공되었으며 론세스바예스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따 소성당 옆에는 순례자들이 놓고 가는 단순하게 생긴 십자가들이 있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이런 식으로 순례길 고유의 풍습을 자신들에게 적용했다. 1127년 산띠아고 순례길에 관한 최초의 가이드북을 쓴 아이메릭 피카우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순례자들은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산띠아고를 향해 기도한다. 각자 예수님의 십자가 모양대로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 이곳에는 천 개도 넘는 십자가가 있는데 이곳에서 순례 중 산띠아고 성인께 처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Monolito de Roldan
롤랑의 거석은 산 살바도르 소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론세스바예스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기억하게 해주는 돌로 된 유물이다.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롤랑이 얼굴을 스페인으로 향한 채 죽어 있는 것을 샤를마뉴가 발견한 곳이 이바녜따 정상 혹은 산 살바도르 소성당 터였다고 한다. 또한 빈사 상태의 롤랑이 샤를마뉴에게 알리기 위해 뿔피리를 불게 했다는 곳이다.




샤를마뉴와 롤랑의 전설
론세스바예스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유명한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con de Roland)의 샤를마뉴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롤랑은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의 조카이자 12명의 성 기사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였다. 샤를마뉴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이 아끼는 보검 Durandart를 하사하였는데 이 검은 요정들이 만든 검으로 산을 쪼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778년 8월 15일 샤를마뉴와 그의 군대는 이슬람교도에게 Zaragoza를 탈환하려는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 후방을 맡고 있던 롤랑의 부대가 롱스포에서 사라고사의 마르실리오 왕으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군대에는 악명 높은 배신자인 Ganelón이 있었는데, 그는 롤랑의 의붓아버지로 롤랑이 기사로 성공하여 샤를마뉴의 오른팔이 된 것을 질투했다고 한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롤랑의 군대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나 자존심과 책임감이 강한 롤랑은 부하인 Oliveros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왕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설의 뿔 나팔 Olifante를 불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주위에 60여 명의 부하들만이 남게 되자 올리판테를 불어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때 샤를마뉴는 가늘롱과 함께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올리판테 소리를 들은 가늘롱은 이미 사라고사의 왕 마르실리오와 결탁하여 롤랑을 처치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게 된다. 롤랑은 죽는 순간 성 베드로의 치아가 포함된 자신의 칼 두란다르트를 파괴하기 위해 바위에 내리쳤는데 바위만 갈라지고 칼은 멀쩡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롤랑과 프랑크족의 열두 명의 성 기사, 용감한 부하 올리비에와 Turpín 주교까지 전멸을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뒤늦게 전투에 패한 것을 알게 된 샤를마뉴는 후방 부대가 잠복했던 계곡까지 돌아가 끔찍한 대학살을 보고, 죽은 병사들을 위한 가톨릭식 무덤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옷을 벗겨서 함께 매장했다. 그러나 적군과 아군을 섞어서 매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샤를마뉴는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금 뒤 병사들이 그에게 달려와서 입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시체가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에 샤를마뉴는 이들을 분리해서 그리스도교 무덤에 매장했다. 이것이 로시스 바예(Rosis Valle; 장미의 계곡) 즉 론세스바예스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샤를마뉴는 적을 쫓아가 전멸시켰고 사라고사를 정복했으며 가늘롱과 공모했던 왕인 마르실리오를 죽였다. 프랑스에 숨어있던 가늘롱은 신의 심판을 받고 네 토막으로 잘려 사형당했다고 한다. 샤를마뉴는 롤랑과 그의 부하 올리비에 그리고 튀르팽 주교의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샤를마뉴는 당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당황스러운 패배를 당하고 나서 시사 골짜기로 후퇴해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이곳엔 아직도 그의 눈물로 젖은 바위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그를 위로하며 젊은 여자들을 불러 모으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에 샤를마뉴는 53,066명의 아가씨들을 불러 모은 후 그들을 기사들처럼 갑옷을 입히고 무장시켰다고 한다. 이슬람군들은 이들을 샤를마뉴의 대군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움에 떨며 항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젊은 여자들이 발까르로스로 돌아와서 창을 바닥에 꽂아놓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기적이 일어나 땅에 꽂아놓은 창이 꽃이 핀 나무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을 ‘창의 숲’ (Bosque de Las Lanzas)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론세스바예스는 롤랑의 노래와 관련된 것으로 넘쳐난다. 샤를마뉴가 자신의 군대가 공격당하는지도 모르고 체스를 두었을 때 사용했다는 아름다운 체스판을 볼 수 있다. 또한 샤를마뉴의 방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령의 성당에는 롤랑이 죽어가며 자신의 칼을 부러뜨리려고 애쓰던 장소가 있고 프랑크의 열두 기사와 전투에서 죽은 영웅들이 매장된 장소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바녜따 언덕에는 롤랑이 도움을 청하며 뿔나팔 올리판테를 불었던 거대한 바위가 있다. 골짜기 반대편의 발까를로스는 샤를마뉴가 체스를 두다가 도움을 구하는 뿔나팔 소리를 들었던 장소라고 한다. 그리고 론세스바예스에서 빰쁘로나로 가는 길 위, Linzoáin이 끝나갈 무렵엔 롤랑과 그의 아내와 아들의 발걸음이 표시되었다는 거대한 돌이 보존돼 있다.

사도 야고보와 순례 기사의 전설
시사 골짜기 근처에는 야고보 성인과 관련된 기적이 처음으로 일어난 장소가 있다. 서른 명의 기사가 함께 순례를 떠났는데 한 명의 기사만 빼고 나머지 기사들은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 도와주고 결코 포기하지 말자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례를 하는 도중 한 기사가 병에 걸렸는데 맹세한 기사들은 모두 병자를 버리고 떠나고 오히려 맹세를 하지 않은 기사만이 남아서 병든 동료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 병든 기사는 곧 시사 골짜기에서 죽어버리고 그를 돌봐주던 기사는 동료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처음 보는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다가와 두 순례 기사를 자신의 말에 태워서 단 하룻밤 만에 그들을 산띠아고 데 꼼뽀스떼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착한 기사는 산띠아고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사도 야고보인지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에 사도 야고보는 죽은 순례 기사에게 무덤을 마련해 주었고 살아남은 기사에게는 돌아가는 길에 거짓 맹세를 했던 옛 동료들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들이 순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라고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바녜따 늑대의 전설
중세 산띠아고 가는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모르는 사람이 함께 걸어가자고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강도들이 다른 순례자들을 속이기 위해서 순례자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동행하기를 청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도둑들은 숲 속에 이르면 동행하던 순진한 순례자들을 폭행하고 옷을 다 벗긴 다음 상처 입은 순례자를 숲 속에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한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순례길을 걸으며 야고보 성인에게 기도하길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에도 이처럼 순진한 순례자와 강도가 있었다고 한다. 같은 순례자인 줄 알고 동행하던 순례자는 늑대 무리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공포에 떨며 산띠아고 성인에게 더욱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눈에서 이상한 광채를 내뿜는 늑대 한 마리가 순례자로 변장한 강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늑대를 피해 달아난 순례자와 강도는 목동들이 살던 오두막을 발견하고 숨었으나, 한밤중에 눈에서 광채를 내뿜는 늑대가 이끄는 성난 늑대 무리가 오두막을 공격했다고 한다. 다음날 강도는 늑대에게 발기발기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백 년에 한 번씩 사건이 일어난 날에는 까미노의 모든 늑대들이 저녁부터 해가 뜰 때까지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거인 왕 산초의 전설
론세스바예스에는 산초 7세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크기는 보통이지만 2미터 50센티미터에 이르는 조각상이 있다. 산초 7세의 별명이 엘 푸에르떼(El Fuerte) 즉 ‘강건한 왕’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초 7세가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La batalla de las Navas de Tolosa)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사슬을 볼 수 있다. 이 사슬은 오늘날 나바라 주의 문장이 되었는데 원래 이슬람 에미르 미라마몰린(Emir Miramamolín)의 막사를 보호하던 사슬이었다. 론세스바예스의 성모 발견 전설에 따르면 10세기경 목동 몇 명이 가축을 돌보면서 밤을 보내고 있던 중 뿔이 환하게 빛나는 사슴이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호기심이 생긴 목동들은 어느 날 밤, 두려움을 떨치고 사슴을 뒤쫓아 가기로 결심하고 사슴을 따라갔다. 그러자 사슴은 어느 한 곳에서 멈추더니 발로 땅을 파기 시작했고 마치 그곳을 파라는 듯한 표정으로 목동들을 쳐다보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목동들이 모두 함께 그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땅 속에 돌로 만든 아치 아래 모셔있는 성모 마리아 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 성당이 세워졌고 발견된 성모상은 현재 건물 안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렇게 열 시간이 넘는 긴 여정 끝에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아침 7시 반에 출발했는데 어느덧 17시 반, 쉬는 시간을 빼면 걷기에만 여덟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실제 내 걸음으론 몇 시간이 걸리는지 궁금했었는데 사실 걷는 시간보다 얼마나 쉬느냐에 따라 그날의 도착시간이 정해지는 것 같았다.

수도원을 개조해서 만든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대규모 숙소였다. 리모델링을 한 12€ 새 숙소는 이미 다 찼고 10€ 옛 숙소만 남아있는 상황이라 더 늦었으면 이 마저도 놓칠 뻔했다. 길에서 주운 재킷은 분실물 코너에 놓아두었다. 두 번째 세요를 받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싱글 침대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더블베드처럼 딱 붙어있는데 내가 배정받은 2층 침대 옆에는 남자가, Y가 배정받은 1층 침대 옆에는 여자가 있어 침대를 서로 바꾸었다. 실내가 너무 추웠다. 샤워하고 짐 정리하고 나니 너무 힘들어서 그냥 쉬고 싶었는데 혼자 걸어가셨던 아저씨가 찾아오셨다. 일찍 도착해서 새 숙소에 짐을 풀었고 근처 식당에 우리 몫까지 저녁 식사를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디너 식사시간이 20시란다.

저녁이 되자 안개가 더 심해졌다. 시간에 맞추어 레스토랑 La Posada로 갔고 한 테이블에 여러 명이 같이 앉아 식사를 했다. 큰 접시에 파스타가 나와서 여러 명과 나누어 먹었는데 열심히 먹었더니 뒤이어 송어구이가 개인 접시로 서빙되어 나왔다. 남이 해주는 음식은 뭐든지 맛있는 법, 힘들었지만 맛있게 먹었다. 빵과 와인도 곁들였다. 식사를 마치니 어느덧 21시 반이 되었다.

밥을 든든히 먹었는데도 너무 추워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고 안개가 너무 심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 계곡이라 그런가 오리털 경량 패딩도 소용이 없었다. 미사가 있다고 했으나 늦은 시간이라 성당은 이미 고요해서 알베르게로 바로 들어왔다. 조금 무거워도 폴라폴리스 소재의 침낭을 갖고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Saint Jean Pied de Port→Roncesvalles 25.6km

○Saint Jean Pied de Port (179M)
-Ruta de los Puertos de Cize
■Arnéguy (268M) 10.0km
■Valcarlos/Luzaide (375M) 3.0km
●Huntto (499M) 5.0km
●Orisson (821M) 2.4km
-Pico de Orisson(1,100m)
●Château Pignon (1,155M) 3.8km
-Virgen d'Orrison
●Col de Bentarte (1,314M) 5.2km
-Cruceiro
□France
-Fontaine de Roland
□Spain
《Navarra》
●Collado Lepoeder(1,429M) 4.0km
■Bosque de Irati 2.5km
●Puerto de Ibaneta (1,056M) 3.6km
●Roncesvalles/Orreaga (953M) 1.6km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
-Claustro de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
-Capilla del Sancti Spiritus
-Museo de la Colegiata
-Capilla San Agustín
-Capilla San Salvador de Ibañeta
-Monolito de Roldan

749.4km/775.0km




Refuge de Peregrinos Roncesvalles -10.00€
Menu 10.00€




까페
믹스커피, 사과, 사탕
파스타, 송어구이, 감자튀김, 와인


Comedor
Microond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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