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o Camino de Santiago #28

Lyon, France

by 안녕
Day 23.
Wednesday, May 17


밤새 뒤척이는 끝 침대 덕에 잠결에도 짜증이 났다. 침대에 오르는 진동뿐만 아니라 사람이 뒤척이는 움직임까지 진동으로 전해졌다. 밤새 시달리다 보니 침대를 이어놓은 그 철사를 끊어내고 싶었다.




어제 늦게 먹은 기름진 음식 때문인지 속이 더부룩하여 일어나자마자 장을 비웠더니 갑자기 스파게티 생각이 났다.

하지만 사다 둔 볶음밥은 아직 개시도 안 했으니 파스타와 올리브는 스페인 가서 많이 먹는 걸로 스스로와 합의 봤다. 이번 여행에서는 먹고 싶은 것은 반드시 챙겨 먹기로 했는데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곳 게스트 하우스는 장소 대여도 해주나 보다. 어제처럼 휴게실을 통째로 빌려주면 음악과 함께 파티를 벌이고 투숙객이든 아니든 다 같이 어울려 놀 수 있었던 거였다.

또한 지나가던 여행객이 게스트 하우스에 딸린 펍에 들러 맥주나 음료를 마시며 쉬었다 가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1번 룸에 머물고 있는 4명의 여자 투숙객 중에 12번 침대의 그녀와 중국어로 대화하던 또 다른 중국인이 어젯밤 캐리어를 꺼내놓고 짐을 싸고 있어서 오늘 체크아웃하는 줄 알았다.

오늘 체크아웃하냐고 슬쩍 말을 건네보니 그냥 짐을 정리한 거란다. 내가 한국인이라니까 12번 침대도 한국인이라고 했다. 정말?

그래도 설마 했다. 나한텐 자기가 중국인이라고 말했으니 이 사람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땅콩버터를 먹어치우기 위해 오늘 아침도 바게트를 먹었다. 남은 샐러드도 한 접시 비우고 나니 배가 부르다. 채소 수프 한통, 쨈 한통, 키위 4알을 얻었다.

정확한 국적을 알 수 없는 12번 그녀가 오늘따라 주방을 독차지하며 거하게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건네는 한 서양인에게 From Korea라고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정말인 거야?

그러다 내 테이블 근처에 앉길래 한국인이냐고 다시 물으니 역시나 어정쩡한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대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얜 뭐지? 한국인이면서 지금까지 아닌 척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야기하기 싫어서라면 인사만 하고 끝내면 그뿐인 것을 뭘 거짓말까지 하고 그랬나 싶다. 그렇다고 내가 기분 나빠하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파리 호스텔 같을까 봐 혹시나 싶어 이곳은 나누어서 예약을 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라 당연히 숙박 연장을 했다.

룸으로 돌아오니 12번 그녀는 짐을 싸기 시작하더니 바로 체크아웃해 버렸다. 괜스레 불편해지려 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12시가 되자 룸 클리닝을 시작했다. 체크아웃한 침대의 매트리스를 치우고 소독약으로 침대 철제 프레임을 꼼꼼히 닦아냈다. 매트리스 커버와 이불 커버를 모두 교체하는 것까지 보고 나니 역시 관리에 있어서도 역시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 느꼈다.

자리를 피해줄 겸 점심을 먹을 겸 주방으로 갔다. 일단 마늘과 냉동실에 들어있는 홍합부터 볶았다. 냉동이긴 하지만 홍합이 오래된 듯해서 Riz a la Cantonaise는 조금만 넣고 볶았는데 너무 맛있었다. 인체 실험 결과 별 탈은 없었으니 다 넣고 볶아도 될 뻔했다.

디저트는 키위 4알과 아이스크림 콘을 먹었다. 냉동실이 보물창고였다. 피자도 누군가 두고 갔는지 오래된 것 같았는데 내가 장기 투숙자라 하더라도 근거리에 마트가 있는데 굳이 냉동식품을 잔뜩 사다 보관해 놓고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다 접수해 주겠어.




오늘은 나가지 않았다. 차라리 어제 나가지 말 것을 그랬다. 너무 많은 곳을 돌아보고 왔더니 오늘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볕이 너무 뜨거우니 상처가 더 가려워서 힘들었던 것 같다. 파리에서처럼 구역을 정해놓고 다녀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리옹은 작은 도시처럼 느껴졌다.




15시쯤 포테이토 칩을 가지고 주방에 갔는데 사람들이 제법 많이 앉아 있었다. 다들 이러고 노는 것 같았다.

냉동 피자를 해동시켰다. 오븐에 구우려고 했으나 예열 시간도 있고 오븐 상태도 별로라 그냥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그런데 녹이고 보니 피자가 아니라 무슨 파이 같았다. 케이스를 버린 상태라 확인할 수 없으니 장르가 뭔지 새삼 궁금해졌는데 바질 맛이 나는 파이였다. 전자레인지에 두 번이나 돌려보았으나 여전히 별로였다. 아까워서 꾸역 먹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우만 먹고 버렸다.




침대에 누워서 칩을 먹고 싶은데 여긴 룸에서 음식 섭취가 금지되어 있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새로운 거에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웨지 포테이토나 먹을 걸 싶었다.

스태프가 교대하는 시간엔 다들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매일 소통을 해서 관리가 잘 되고 있나 보다.

느끼한 가운데 저녁은 또 몇 시에나 먹을지 즐거운 고민을 하면서 그 와중에 초코퍼지를 하나 먹었다.

오늘도 하루가 그냥 흘러간다. 침대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으니 꼼짝하지 않아도 되는 게 문제였지만 나에겐 제대로 된 휴식이었다.




17시쯤 11번 침대의 중국인이 쇼핑백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나한테 12번 그녀와 얘기해 봤냐고 물었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 그녀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같은 한국인인 내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기분은 언제나 싫었다.

자기 침대에 누군가의 외투가 놓여 있다며 나한테 알고 있는 게 있는지 물어보았다. 누구 건지 나도 몰라서 그냥 리셉션에 갖다 주라고 했다.

그녀는 다시 나갔고 20시쯤 화장실에 갔다 오다 보니 외출했던 그녀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옷이 한국 옷이라며 12번이 두고 간 것 같단다. 아마 자기가 가지겠다는 말인가 싶어 그러라고 했다.




주방에 가니 그녀 혼자 밥을 먹고 있어서 난 그 옆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는데 먼저 얘기를 건넨다.

영어가 힘들지만 그럭저럭 대화를 이어가는데 리옹 역에서 캐리어를 도둑맞았단다. 그래서 모든 걸 다 구입할 수밖에 없어서 지금은 대부분 쇼핑을 하러 다니고 있단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쇼핑을 다니면서도 캐리어가 비어 있었던 이유, 그래서 그런 사정을 아는 12번이 외투를 놓고 갔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러다 문득 자기는 일본인이라는 고백을 했다. 두 번째 충격이었다. 얘네들 뭐지?

한국인은 중국인으로 위장을 하고 일본인은 중국인으로 위장을 했던 거였다. 너무 당황하니 일본어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 진작 말했으면 힘든 영어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제야 우린 말이 트였고 일어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12번이 중국어가 가능했고 그녀는 영어보다 중국어가 편해서 그렇게 중국어로 얘기를 했던 거란다. 중국말을 하고 있으니 난 그녀도 중국인인 줄 알았고 그래서 어디서 왔냐고 묻지도 않았던 거였다.

하긴 지금 우리의 대화를 들은 한국인이 있었다면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어디서 왔냐고 묻지 않았겠지 싶었다.

21시가 넘으니 이젠 짐 싸야 한대서 대화를 멈추었다.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일본인인 줄 진작에 알았을 텐데. 유끼는 내일 샤모니로 떠난단다. 나도 갈 뻔했던 샤모니, 아쉬웠다.

그래서 사정을 들은 12번 그녀가 겨울 옷을 주고 갔나 보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라 생각하고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중학생 때 성당에서 자매결연을 맺었던 일본으로 여름캠프를 갔었는데 함께 캠프에 참가한 일본인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외국어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영어권, 아니 일본 이외의 나라로는 절대 가지 못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만약 그때 영어를 쓰는 친구를 만났다면 어쩜 영어를 공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벌레 한 마리가 얼굴 주변에 있는 걸 보았다. 이건 뭐지? 소리 없이 다가와 있던 벌레는 모기였다.

손을 내저으니 그제야 소리를 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처럼의 수다에 피곤해져서 방어할 기력이 없으니 두꺼운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사람들이 밤마다 벅벅 긁어대던 이유는 모기 때문이었나 보다.

모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잠이 들었으나 너무 더워서 깨니 모기는 다른 침대로 갔는지 조용했다.




Le Flâneur Guest House -19.00€


Cuisine
Réfrigérateur
Four à Micro-On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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