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o Camino de Santiago #31

Lyon, France

by 안녕
Day 26.
Saturday, May 20


어젯밤엔 주방에 갔다 오는 게 귀찮아 침대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칩까지 몰래 먹고는 잠이 들었다.

누가 죽었다고 어머니가 알려주는데 그게 누구냐니까 부엉이 헤드위그 새끼라고 하는, 뜬금없는 꿈을 꾸었다.




마지막 포테이토와 채소 모둠을 넣은 볶음밥, 요거트, 까망베르 치즈와 빵을 먹었다.

과식이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떼뜨 도르 공원에 갈 거니 든든히 먹어두었다.




리옹에 있는 Parc de la Tête d'or는 약 117 헥타르의 면적을 가진 도시공원이다. 큰 호수가 있는 이 공원은 리옹 6구에 있다.




10시쯤 나섰다. 주말이라 그런가 강변 따라 이어진 벼룩시장을 구경하며 갔다.

빵과 치즈가 있는 풍경이 프랑스를 느끼게 해 주었지만 바람도 불고 구름이 잔뜩이라 너무 추웠다. 걸을 때 불필요한 것은 모두 숙소에 두고 왔는데 스카프라도 두르고 올 걸 그랬나 싶어 후회가 되었다.




천천히 걸어서 그런가 한 시간쯤 걸려 도착한 공원엔 대부분이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었다. 꼬마 아이가 나보고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흰구름과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날씨라 소풍 하기에 좋았다. 커다란 호수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 곳곳에는 소풍 나온 이들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푸르른 나무를 보니 기분은 상쾌했다.




공원 가운데 있는 수중 터널을 도보로 건너서 조그만 수브니흐 섬으로 갔다.

어두운 날씨에 기념물과 조각들만 있는 그곳은 을씨년스러웠다.

호수를 따라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함께라면 더 좋았을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동물원과 식물원이 보였지만 패스, 혼자라서 그런가 벌써 힘들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가자고 미루어 두었던 많은 곳들도, 이번 생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혼자 찾아다니게 되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다 보니 아무거나 먹었고 사진도 찍지 않게 되었다. 어딘가에 올리는 사진도 싫었고 개인 소장용으로 찍던 사진도 이젠 필요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한량의 모습으로 다니는 게 여행의 전부였다.




처음 블로그를 하면서 취미로 시작했던 뜨개질을 블로그에 올리자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게 신기해서 열심히 활동을 했고 수년간 지속되자 업체로부터 협찬도 받게 되었다.

뜨개질을 하지 않을 때에는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서 찍은 사진을 올려서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평상시에는 자랑할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 집에서도 예쁘게 차려놓고 먹기에 이르렀다.

취미로 시작했던 일들이 어느새 의무감이 되어버려 틀 안에 갇힌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모든 활동을 접었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잘난 체하려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무언가를 시작하면 또 무언가에 빠져 포장하고 있을 것 같아 두려웠고 그러다 내가 누구인지 착각할 것 같아 지금도 여전히 SNS는 기피하고 있다.

할 말 있으면 일기장에 적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숙소에 돌아오니 13시가 넘었다.

룸에 와서 오렌지 주스를 마셨는데 아직 청소 중이라 다시 주방으로 갔다. 마지막 생선가스와 웨지 포테이토, 아보카도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유럽에서 좋은 점은 아보카도를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이 피클을 비우고 까망베르 치즈를 곁들였는데 크림치즈와 일반 치즈의 중간 정도의 질감이라 치즈를 녹여 먹을 수 없다면 까망베르 치즈가 좋을 수도 있겠다 싶다.

배가 터질 것 같아 빵은 차마 먹지 못하고 치즈만 먹었는데도 맛있었다. 이래서 치즈를 와인에 곁들여서 먹기도 하나 보다.

아침에 먹은 것도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는데 또 먹었으니 배가 터질 것 같다. 홍차 한 잔 마시다 속이 답답해서 세븐업 한 캔을 땄다.

냉동실 프리 존에 웨지 포테이토가 있음에도 누군가 사 왔는지 한 봉지가 더 들어 있었다. 월요일까지 남아있으면 루르드 가는 기차에서 먹을 런치박스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름 일정이 있었던 날임에도 오늘도 난 여전히 숙소지기가 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난 어떤 투숙객일까? 처치 곤란한 음식을 처리해 주는 고마운 존재일까? 아님 남은 음식을 탐내는 얄미운 존재일까?

점점 뻔뻔하게 적응하는 걸 보니 여기도 이제 슬슬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어제 내린 비로 당분간 비 소식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루르드에 가선 비 소식이 있었다.

이동하는 월요일만이라도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까미노 시작하기 전 마지막 도시인 루르드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고 떠날 수 있길 부탁드려 본다. 갑자기 서글퍼진다.




식탁에 앉아서 스태프들의 움직임을 멍하니 구경했다. 참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일하면서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거나 짜증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밝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그들의 해맑음이 그저 좋았다. 그리고 부러웠다.




투명한 푸드 박스에 일본어가 보여서 꺼내보니 칼로리 발란스와 캐러멜 와플이 들어있었다.

빈 봉투를 접어 서랍에 정리해 넣다 보니 마지막 칸에 그렇게 찾던 커피가 들어있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같이 들어있는 지저분한 칸이라 커피를 꺼내놓았다.

몇몇의 장기 투숙객들을 제외하곤 하루 이틀이면 떠나는 단기 투숙자들이 많아서 매일 아침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 프리 존.




냉장고 하나는 노부부의 식재료로 가득 차 있고 다른 냉장실엔 피자가 들어있었다. 내 배는 아직 부른데 어느덧 저녁 먹어야 할 시간이다.

4 Fromage 피자는 신선한 피자라 그런지 치즈의 맛도 풍부하고 정말 맛있었다. 절반만 먹고 나머지는 포장했는데 주방에 포일이랑 랩이 구비되어 있는 점도 참 좋았다.




21시 반쯤 주방에 갔다. 피자는 두 판이 사라지고 한판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세븐업은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이 있었던 걸까, 아님 다른 이가 먹었을까?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이고 보니 커피가 사라졌다. 펍에서도 커피를 팔고 있어서 스태프가 치워두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꺼내 두진 않았다.

조식으로 판매하고 남은 바게트가 굳어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먹지 않았다. 바게트나 먹을 걸 그랬다.




루르드 예약서를 보니 숙박비 14.10€, 도시세 0.40€ 그래서 1박당 14.50€인데 추가 6€는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




●Parc de la Tête d'Or




Le Flâneur Guest House -19.00€


Cuisine
Réfrigérateur
Four à Micro-On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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