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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성장을 응원해

@리빙스턴, 잠비아

by 지수




한산한 주말 오후는 오고 가는 해사한 말소리로 가득하다. 장기 하우스는 새로운 봉사활동 참여자들을 하나둘 맞이한다. 월요일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어서 일요일 저녁 테이블에는 각국에서 온 친구들로 복작인다. 제각기 다른 시간에 도착하다 보니 하루의 절반은 자기소개의 반복이다.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 먼저 온 동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까닭 모를 박장대소에 당황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답한다.

- 다섯 번째 듣는 말이거든.

다 같이 모이는 자리면 머릿수로 출석 체크를 한다. 대한민국 지수, 일본 케이, 홍콩 제시카, 영국 조지와 조슈아, 프랑스 데이비드, 캐나다 스칼렛, 멕시코 제이피, 안드레아와 타냐, 콜롬비아 다니엘과 로레나, 호주 윌리엄과 베네사까지 아홉 개 국적의 열네 명의 친구들이 장기 하우스의 가족이다.


좁은 주방 덕에 탁자와 의자가 바짝 붙어 있다. 오는 순서대로 안쪽부터 자리를 채운다. 인원이 많다 보니 매번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바뀐다. 새로운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신선함에 자꾸 질문하게 된다.

- 작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어. 지금은 갭 이어(gap year)를 보내고 있어.

- 일 년 동안 세계여행 중이야. 방문하는 나라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

멕시코의 안드레아와 타냐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갭 이어를 선택했다. 흥미 있는 분야는 있지만 전공을 정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중이다. 룸메이트 스칼렛은 요리사를 꿈꾼다. 마지막 여행지 이탈리아에서 인턴을 하기 전에 한 해 동안 세계여행 중이다. 놀랍게도 스리랑카, 인도,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머무르는 나라에서 다방면의 봉사활동에 임하고 있다. 다음 여행지인 탄자니아에서도 워크캠프에 참여할 예정이라는데 그녀의 봉사활동을 중심으로 한 여행 방식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양한 나이와 관심사,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의 삶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중 공통된 관심사는 역시 프로그램이다.

- 유치원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지원했어.

- 나는 건설 쪽이야. 저번에 가르치는 활동을 해봤는데 어렵더라. 하하하.

다가올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과 경험을 공유하며 떠들썩한 저녁을 보낸다.


흥부자 안드레아와 룸메이트 스칼렛


장기 하우스는 도심 외곽에 있어 시내와 거리가 멀다. 더욱이 와이파이나 데이터도 없어 아날로그식으로 생활해야 한다. 때문에 식사 시간 이후에는 대부분 거실에서 함께 한다. 처음에는 카드 게임을 하며 몸을 푼다. 트럼프 카드는 만능 놀이 도구이다. 라틴문화권에서 유행하는 마노타소(manotazo)를 배운다. 1부터 킹까지 순서대로 외치며 카드를 뒤집는데 뒤집은 카드와 숫자가 일치하면 가운데 놓인 카드 위에 재빠르게 손을 얹어야 한다. 마지막 사람은 벌칙으로 독극물 주스를 한입에 마셔야 한다. 독극물 주스는 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고통을 주는 단맛이 강한 과일주스이다. 물을 많이 넣어 희석해야 하는 사실을 몰라 다들 한 번씩은 독극물 주스의 공포를 맛본 상태이다. 벌칙 수행자의 절망 어린 표정을 생중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임에 익숙해지면 규칙을 바꾼다. 우리의 제1 언어는 역시 영어이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친구는 다섯뿐이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은 스페인어이다. 두 번째 판에는 스페인어로 숫자를 외친다. 경기 시작 전 여러 번 되뇌지만 까먹는 사람이 꼭 생긴다. 남미 여행에서 돈을 계산하거나 흥정을 할 때 톡톡히 써먹었기에 눈치껏 피해 간다. 세 번째 판은 프랑스어이다. 4년 전 기초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있지만 오래되었고 스페인어와 뒤섞여 혼란을 일으킨다. 결국 걸렸다. 죽음의 독극물 주스를 원샷하자 정신이 바짝 든다. 마지막은 나의 무대이다. 한국어로 숫자를 가르치자 데이비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받침 있는 낱말을 특히 어려워하는데 칠과 팔에서 고비가 온다. 간단한 인사말을 배우고 서로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문화 게임의 현장은 매일 밤 이어진다.




함께 근무하는 팔월 첫째 주는 대부분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한 시 즈음이면 다들 퇴근하여 점심을 먹는다. 이후의 자유시간에는 왁자지껄한 저녁과는 달리 진지한 토론과 나눔이 벌어진다.

- 브렉시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말도 안 되지. 그 이후 많은 게 바뀌었어. 세대 간 갈등도 있었고 정보 전달이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해의 소지도 많았어.

정치 시사에 관심이 많은 제이피가 영국 친구 조지와 조슈아에게 브렉시트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유럽연합에 속한 데이비드도 의견을 보탠다. 제이피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각국의 정치와 경제, 세계적 이슈, 지도자의 자질과 평가 등 수많은 화젯거리를 테이블 위에 올린다.

- 대한민국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가치가 뭐야?

-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과정이 핵심 화두야.


다채로운 주제만큼이나 개개인의 견해와 입장이 다양하다. 특히 통일 관련 물음은 나를 뜨끔하게 만든다.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북미 관계가 역전됨에 따라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무렵이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만나는 영상을 봤어. 한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통일은 우리의 오랜 소원이야. 이산가족의 아픔이 하루빨리 해소되고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

- 이산가족을 정기적으로 만나게 해 주면 안 돼?

-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양국의 상황과 국제사회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거든. 그리고 북한은 남한만큼 시스템이 확충되지 않아서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도 복잡해.

사안 자체가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 친구들은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 국내의 정치적 대립, 국가 간 이해관계의 충돌, 국민 정서 등 이야기를 꺼내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로 타 국가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기쁘다.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지도 엿볼 수 있고 보다 넓은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기회가 된다.


친구들과 열흘 간 함께 한 여정 중 나를 가장 자극한 건 그들과의 대화이다. 생각의 탁월함보다는 평소 나의 일상적 대화 소재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늘 어렵게만 여겼던 경제 정책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세계의 여러 정책과 이슈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해결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안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가 단단해진다. 미뤄두던 언어 공부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며 하고 싶은 일 리스트에 꾹꾹 눌러 적는다. 나라도 언어도 다르지만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멋진 장기 하우스 가족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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