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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아 교육 현장에서 일하다

@리빙스턴, 잠비아

by 지수





여섯 평 남짓한 교실은 스물다섯 명의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북적북적한 유치원 내부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살뜰하게 꾸며져 있다. 북쪽에는 하얀 분필가루가 진하게 묻어나는 칠판이, 남쪽에는 볕이 잘 드는 기다란 창이 자리한다. 앙증맞은 그림과 글자는 노란 벽을 알록달록하게 장식한다. 서쪽 벽면에는 물장구치는 오리 열 마리의 배에 숫자 1부터 10까지가, 동쪽 벽면에는 영어로 쓴 요일과 열두 달이 붙어 있다. 그 옆으로는 알파벳 a부터 z가 주황 나비의 왼쪽 날개 위에 앉아 있다. 오른쪽 날개에는 해당 알파벳과 연관된 그림을 그렸다. a는 apple, b는 ball, c는 cup이다. 어릴 적 영어 특별실을 떠올리게 하는 이곳은 잠비아의 보편적인 교실 풍경을 보여준다.


잠비아는 냔자어, 벰바어를 비롯하여 73개의 부족어를 사용한다. 언어의 다양성은 풍부한 문화적 소실을 낳지만 소통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오직 영어만을 통용한다. 'No speaking Vernacular', 교실 뒷벽에 부착된 규칙은 모국어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담당하는 학급은 만 4세 학생들이 모인 리셉션 클래스이다. 모어(母語)로 하는 대화도 능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을 따라가려면 분명 어려움이 많을 테다. 종종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면 눈치껏 대응한다. 말보다 몸짓이 의미를 더 잘 전달하기도 한다.


잠비아의 유치원 교실 풍경


허리께까지 오는 아가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필을 움켜쥐고 수업을 듣는 모습은 절로 엄마미소를 짓게 한다. 무릎 높이의 책상은 다리를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낮지만 아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교실에는 네 개의 커다란 책상이 있고 대여섯 명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선생님이 칠판에 공부할 내용을 적으면 학생들은 부지런히 따라 적는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자를 들고 노트 하나하나에 선을 긋는다. 줄이 없는 무지 공책은 네 살 어린이가 필기하기에 퍽 불편하다. 먼저 왼쪽 모퉁이에서 엄지손톱만큼 공간을 비우고 세로로 선을 죽 내린다. 그런 다음 오른편 상단에 가로로 세 줄을 긋는다. 이때 첫 번째는 절반 길이여야 한다. 날짜를 기록하는 칸이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짧거나 길면 원성을 살 수 있다. 두 번째에는 과목이나 단원을, 세 번째에는 학습할 주제를 쓴다. 하단의 넓은 공간에는 그림과 핵심 낱말을 정리한다.


이리저리 테이블을 옮겨가며 공책 정리를 돕고 나면 본격적인 지도를 시작한다. 공중에서 진행 과정을 빙 둘러본다.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척척 잘 해내는 친구도 있지만 아예 시작도 못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 개구쟁이 보스턴부터 봐주어야겠다.

- 숫자를 반대로 썼네. 3이 뒤집어졌어. 다시 써보자.

지우개로 지운 자리에 꾹꾹 연필심을 누른다. 아이고, 또 잘못 썼다. 다시 지우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보스턴이 쥔 연필 위로 손을 감싸고 함께 적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는다. 그러더니 연필을 나에게 준다. 스스로 해야지! 보스턴과 날짜 쓰기로 씨름하고 있는 동안 애니는 벌써 끝마친 모양이다. 공책을 활짝 펼쳐 얼굴 앞에 들이민다. 엄지 척과 함께 칭찬을 쏟아내자 수줍게 웃으며 담임선생님께 검사를 받으러 달려간다. 주위를 둘러보니 절반 정도 끝마쳤다. 건너 책상의 조슈아가 팔을 세게 당긴다. 옆자리 의자를 툭툭 치며 얼른 오라고 보챈다. 같은 테이블의 친구들도 목소리를 높인다. 옮길 때가 되었나 보다.


햇살 좋은 점심시간을 즐기는 아이들


폭풍 같던 오전이 지나자 점심시간이다. 교실 밖을 돌아 나와 한 줄 서기를 하며 순서대로 손을 뽀득뽀득 씻는다. 볕이 잘 드는 처마 아래에 자리 잡는다. 아이들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과 과자, 음료수를 꺼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돌린다. 보조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선생님은 어떠실까? 나이가 어릴수록 손이 많이 가는 법이다. 제시카까지 세 명이 함께 보아도 꼼꼼하게 챙겨주지 못하는데 평소에 담임교사 홀로 어떻게 학급을 꾸려나갈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배를 채우면 놀이터로 달려간다. 그네와 시소, 회전의자는 벌써 만원이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도 하고 줄넘기를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줄넘기가 아니다. 새끼를 꼰 빨간색 줄은 손잡이가 없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눈으로 가늠하여 자신에게 맞는 길이를 선택한 뒤 끝자락을 손에 둘둘 만다. 손목을 이용해야 하는데 줄이 손에 감겨있다 보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깡충깡충 잘도 뛴다. 긴 줄을 꺼내 옆 반 선생님과 다섯 걸음쯤 띄운다. 두어 명이 들어가자 힘차게 줄을 돌린다. 엘레나는 박자와 상관없이 콩콩 뛰다 금세 걸린다. 윗 학년 친구들도 뛰어 들어온다. 몇 차례 하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줄을 잡겠단다. 등 떠밀려 가운데에 들어가니 또 신이 난다. 얼마만의 긴 줄넘기인가. 건너편에서는 제시카가 힙합댄스를 가르치고 있다. 간단한 동작을 연결하여 알려주자 아이들이 곧잘 따라 한다.


신나는 놀이가 끝나고 하교 준비를 한다. 분홍색 교복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가방을 멘다. 굳게 닫힌 철문은 보호자가 오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찍 도착한 어머니는 교문 앞에서 아이를 맞이한다. 우르르 나가기도 하나둘 점점이 흩어지기도 한다. 꽤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이클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어깨에 내려앉은 나뭇잎을 털어주다가 앞 지퍼가 고장 난 노란 가방이 눈에 띈다. 가방 중앙에 청색 실로 박은 글씨는 한글이다.

- 어떤 뜻이에요?

- ‘참 좋은 어린이집’이네요.

이제 보니 아이들의 가방에 적힌 언어가 제각각이다. 한글, 한자, 영어, 프랑스어. 각 나라에서 보낸 구호물자가 실제로 전달되어 쓰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수십 년 전만 해도 배급받는 생활을 했다는 게 실감 나지 않기도 하다. 그제야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여행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꼬불꼬불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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