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배움의 기회를 누리길 바라요
@리빙스턴, 잠비아
드르륵드르륵. 시장에서 공수해온 미니 연필깎이로 새로 사 온 연필을 힘주어 깎는다. 간단하게 툭툭 부러지는 연필심이 눈에 밟혀 구매했는데 영 상태가 시원찮다. 한국에는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연필이 많다 보니 표면이 그대로 날아가는 껍질이 익숙지 않다. 손 안쪽 날이 빨갛게 익고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회전을 주어도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새 연필을 선물 받아 들뜬 아이들은 어서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마음처럼 빨리되지 않는다. 교실의 분실물 상자에 넘치도록 담긴 학용품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분명 주인이 있음에도 찾지 않는 연필 뭉텅이는 잠비아 학생들이 평생 동안 갖지 못할 양질의 문구 일지도 모른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지우개는 이곳에서 스물다섯 명이 탁자에서 탁자로 옮기며 나눠 쓰는 소중한 단 하나의 지우개이다. 빨간색 볼펜은 지그재그로 그어도 나올 기미가 없어 채점하는데 소용이 없다. 사인펜과 색연필은 넉넉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사용할 수 없는 고가의 채색 도구이다. 공간을 넘나들 수 있다면 쓸모가 있음에도 버려진 학용품 상자를 통째로 들고 오고 싶다. 꼬리 달린 튼튼한 연필깎이도 함께 말이다. 그 정도 수량이면 한 해 동안 학급에서 풍족하게 쓸 수 있다. 괜스레 아프리카 아이들이 기아로 고통받는 와중에 미국에서 과잉 생산된 농작물을 그대로 버리는 뉴스 장면이 떠오른다. 이럴 때는 세상 참 불공평하다.
학기말이라 담임교사는 방과 후에도 성적처리로 여념이 없다. 마주 앉아 제출한 작품을 감상한다.
- 왼쪽이 더 창의적이에요. 무지개도 표현했네요.
- 맞아요. 이건 어때요?
선생님은 수기로 아이들의 성적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체육, 글쓰기, 숙제 등 항목이 다양하다. 수치화할 수 있는 과목은 더하여 총점을 매긴다. 핸드폰의 계산기 앱으로 빠르게 합을 구하자 선생님의 표정이 밝아진다. 성적을 전산화하여 처리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컴퓨터가 부족해 일일이 손으로 작성해야 한다. 업무도 업무지만 교실 내 ICT 장비가 없다 보니 수업에 영상이나 시각 자료를 활용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 한국에는 공립과 사립 중 무엇이 더 많나요?
- 학교 급별로 다르겠지만 대체로 공립이 많아요.
다른 나라의 교육 환경은 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흥미로운 대상인가 보다. 잠비아는 공립보다 사립이 압도적으로 많다. 공교육 시스템이 견고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학생 전체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교원 자격을 갖추어도 공립학교에서 근무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해요. 예산이 부족해서 제때 투입할 수가 없어요. 옆 반 선생님도 마찬가지죠.
잠비아에서는 사립이 공립보다 훨씬 환경이 좋다. 사립학교인 이곳은 학급당 인원이 스물다섯이다. 반면 공립학교에서는 마흔을 훌쩍 넘는다. 때문에 형편이 여유로운 가정은 사립을 더 선호한다. 유치원 아이 사십 명을 한 교실에서 선생님 한 분이 지도한다는 사실은 보고도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도 아버지 세대에는 사정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육십 명이 콩나물시루처럼 수업을 들었고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운영되었다. 오늘날의 잠비아는 우리나라가 거쳐 간,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태동의 과정에 있다.
마지막 수업의 교편은 내 손에 있다. 오늘의 주제는 동물이다. 가축과 야생동물을 분류하는 활동을 한다. 그림에 젬병이라 하나를 그리고 눈치를 살핀다.
- 이게 뭘까요?
- 강아지예요!
고양이와 강아지의 어느 중간, 병아리와 오리의 어드메인 요상한 모양인데도 척척 알아맞힌다. 마음의 눈으로 본 대답에 감동 한 움큼이다. 낱말을 읽으면 아이들이 소리 내어 따라 읽는다.
- PIG! PIG! PIG!
- 돼지는 어떻게 쓸까요? 첫소리를 찾아보세요.
두 입술을 붙였다 벌리며 p음을 낸다. 아직 감을 못 잡았나 보다. 벽면의 나비 날개를 긴 막대기로 가리킨다.
- 냄비(pot)와 첫소리가 같아요. 무엇이죠?
처음에는 소리를 듣고 알파벳을 유추하게 한다. 단어가 어렵거나 도통 음을 찾지 못하면 교실 벽면에 붙은 학습 자료를 활용한다. 칠판 한 가득 동물을 그리고 아래에 철자를 적으니 아이들이 배운 내용을 공책에 필기한다. 부족한 그림에도 정성스레 선을 따라 긋는 예쁜 마음에 민망하기도 고맙기도 하다.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먹먹하다. 온몸으로 표출하는 아쉬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팔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는 여호와 김,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는 존, 생머리인 내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땋아주는 호프, 목덜미를 끌어안고 뺨을 비비는 페이스. 서로에게 같은 말만 반복한다.
- I MISS YOU SOOOOO MUCH. (그리울 거야.)
기나긴 인사 끝에 교장실에 들어선다. 선생님께서 커다란 책을 꺼내신다. 지금까지 졸리 제미야 학교를 방문한 봉사활동 참여자들의 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한다. 지난 참여자의 글씨 아래에 내 이름을 꾹꾹 눌러쓴다. 내가 마지막은 아닐 테다. 앞으로 계속 누군가 아이들을 만나러 올 것이고 오면 좋겠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웅에 코가 시큰해진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꼭 끌어안으며 다음을 기약한다. 다시 오면 이곳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 교문을 넘었을 때의 두근거림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 한 편에 간직해 온 꿈, 아프리카에서의 봉사활동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무작정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자 했던 투박한 시작은 시간이 쌓임에 따라 더 넓게 멀리 바라보게끔 매듭지어졌다. 자그마한 도전은 잠비아의 미래와 교육의 힘에 대한 믿음에 가닿았다.
잠비아의 문해율은 2015년 기준 61.4%이다. 초등학교 등록률은 50% 내외이다. 이중 졸업까지 학업을 지속하는 비율은 더 낮다. 입학 전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는 아동은 14.5%에 불과하다. 봉사활동을 하며 목격한 잠비아의 교육환경은 열악하지만 이러한 교육기회조차 누리지 못하는 학생이 훨씬 많다. 교육은 단순히 배움에 그치지 않는다. 고등교육과 직업훈련을 받으면 보다 나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생기고 가계경제 및 국가경제를 살리는 밑거름이 된다.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은 위생과 보건에 대한 개념을 형성한다. 평균 수명을 높이고 유아 사망률을 줄이며 에이즈와 같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용이하게 한다. 문해율 증가는 투표 참여율을 높여 민주적인 정부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부당한 일을 겪으면 자신을 항변하게 한다. 저개발 국가일수록 교육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까닭은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느리게 성장 중이지만 잠비아의 교육이 멈추지 않길 바란다. 다음에는 조금 더 넉넉하길, 아니 적어도 배움의 기회는 박탈당하지 않길 소망한다. 졸리 제미야 선생님들과 스물다섯 명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잠비아의 등불이 되길 간절히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