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나른해진 몸을 식탁에 누인다. 일주일 간 쌓인 피로가 졸음으로 찾아와 눈꺼풀에 무게를 지운다. 주크박스 안드레아는 웬일인지 자리를 비웠다. 담 밖에서 날카롭게 진동하는 경적과 주방에서 부딪히는 그릇 소리를 자장가로 삼는다. 옆자리에서 주고받는 달짝지근한 대화가 점점 희미하게 멀어질 무렵 난데없는 스피커 소음이 귓가를 파고든다. 지지직 지지직. 깨끗한 음질을 내려 연결을 시도하길 수차례, 마침내 진동판을 뚫고 나온 음악은 낯선 언어로 리듬을 뱉는다. 고개를 들어 디제이의 얼굴을 확인하니 갸웃거리는 턱의 각도가 더 아래로 기운다. 분명 타냐나 로레나일 거라 예상했는데 생뚱맞게도 윌리엄이다. 요즘 호주에서 라틴음악이 유행인가? 반쯤 뜬 눈으로 지그시 스피커를 응시하자 볼륨을 올리는 손가락과 비트를 타며 어깨를 흔드는 윌리엄이 보인다. 헤비메탈 락커를 연상시키듯 머리를 위아래로 털고 골반을 좌우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대낮의 댄스파티가 열린다.
중단발 기장의 금발 머리를 휘날리는 윌리엄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턱을 까딱까딱한다. 윙크인 듯 찡그린 듯 한쪽 눈을 감으며 박자를 타는 모양이 지켜보는 관중의 내적 댄스를 불러일으킨다. 고개를 앞뒤로 밀며 흐름에 몸을 맡기자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다가온다. 정중하면서도 유혹적인 손길을 피할 까닭이 없다. 좁다란 테이블 사이에서 그의 이끌림에 맞추어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윌리엄과 달리 동작이 정돈되지 않아 발을 밟기도 제멋대로 회전하기도 한다.
-스텝을 가르쳐 줄게. One, two, three! five, six, seven!
좁은 보폭으로 한 발자국씩 앞뒤로 움직인다. 왼발이 먼저였나. 오른발부턴가. 앞-제자리-뒤 순서가 맞나. 기본 스텝이지만 초심자에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돌아오고 뒤로 빠졌다가 제자리를 찾는 루틴이 엉성하게 어긋난다. 윌리엄은 사려 깊게도 패턴이 몸에 익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익숙해질 무렵에야 이 춤의 정체를 묻는다.
-살사 댄스야. 체 게바라도 하바나에서 살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하하하.
윌리엄, 제시카, 이와스와 함께 한 대낮의 댄스파티
다음 차례는 제시카이다. 홍콩에서 걸스힙합 동호회를 이끌고 있는 그녀는 유려한 웨이브를 선보인다.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에게 간단한 동작을 가르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살사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 리듬에 맞추어 강렬한 바운스를 적절하게 녹아낸다. 실력보다 돋보이는 건 빛나는 자신감과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는 태도이다. 부엌 먼발치에서 곁눈 짓으로 깜짝 파티에 참여하던 이와스가 식탁으로 걸어 나온다.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윌리엄이 막아 세운다. 숙소 엄마 이와스야 말로 진정한 주방의 호스트이다. 박수 소리가 빗발치자 부끄러움은 잠시, 크게 박자를 탄다. 무릎을 굽힌 채로 골반을 사선으로 당기며 어깨를 들썩인다. 윌리엄과 제시카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하며 흥을 끌어올린다. 마지막으로 익살꾼 조지가 상체를 털며 막춤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윌리엄은 Friday Night(불금)을 그냥 넘길 수 없다며 저녁 파티에 모두를 초대한다. 예고편이 이 정도인데 본편은 도대체 어느 만큼일까?
시내에서 오후 나절을 보내고 돌아오니 기다란 식탁을 둥글게 붙여 둘러앉아 있다. 열넷 완전체가 다 모였다. 그중 새로운 얼굴이 눈에 띈다. 윌리엄이 현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 부부를 초대했다.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와 손님의 등장에 한껏 고무된다. 많은 인원으로 다소 주의가 산만할 법 한데 음악 소리가 모두를 집중시킨다. 강한 비트감의 힙합이 흘러나오자 단정한 하늘색 셔츠에 차분한 인상을 지닌 선생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는 평소 좋아하는 곡인지 가사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외운다. 뛰어난 랩 실력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첫인사를 건넨다. 단시간에 흐름을 주도하는 그의 리더십에 벌써 팬이 되었다. 노래가 하이라이트로 치닫자 개사를 하며 호응을 이끌어낸다.
-Say Zambia! (Zambia!)
무엇에 홀린 듯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따라 한다. 그가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면 목소리를 두 배로 높인다. 손동작의 지시에 따라 전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목청을 높여 잠비아를 연호하고 동작의 크기를 키운다.
-Everybody, do like this!
어깨를 좌우로 털자 방 안 가득 잔물결이 인다. ‘Zambia wave’가 저녁을 휘몰아 삼킨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잠비아의 흥을 보여준다.
첫 곡을 즐겼을 뿐인데 이미 실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다음 무대의 주인공은 누굴까. 인트로가 나오자마자 모든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인다.
-I have a pen. I have an apple. Oh, apple pen!
몇 해 전 전 세계를 강타한 전설의 노래 PPAP가 떴다. 일본인 싱어송 라이터 피코타로가 공개한 짧은 영상은 금빛 호피무늬 의상만큼이나 감각적이고 유쾌하다. 케이는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마음의 준비를 끝마치고 일어선다. 부끄럼쟁이 케이가 일본이 모국이라는 이유로 가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에 다들 흥분에 찬 함성을 지른다. 왼손에는 펜을, 오른손에는 사과를 든 채로 몸을 흔들다 마침내 펜을 사과에 꽂는다. Apple pen! 2절에는 진지한 분위기로 바꾸어 절제된 표정으로 케이의 동작을 따라 한다. 웃음이 터지면 끝장이다. 마주 보고 있는 베네사와 눈이 마주치자 폭발 직전이다. 입술을 꾹 깨물고 어깨춤을 춘다. 참고 참다가 하이라이트에 이르자 다들 누르고 있던 에너지를 발산한다. Pen-Pineapple-Apple-Pen!
함께 하는 즐거움은 다양성으로 극대화된다. 아홉 개의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열네 명의 친구는 저마다의 언어와 문화를 담은 노래를 공유한다. 그렇다고 어렵지는 않다. 누가 들어도 가슴을 쿵 울리는 음악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아시아로 돌아온다. 비장의 카드를 꺼낼 때이다. 스피커를 타고 첫 음이 흘러나오자 다니엘이 엄지를 치켜세운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의자를 밀어 넣는다. 중독성 강한 도입부에 맞추어 윌리엄이 전구 스위치를 껐다 켰다 반복한다. 싸이키 조명을 모방한 잦은 빛의 소멸은 마치 클럽에 온 듯하다. 비트가 빨라짐에 따라 점등하는 손놀림도 바빠진다. 곡의 절정에 이르자 교차하던 손가락이 멎고 실내가 환해진다.
-오빤 강남 스타일!
바닥이 진동하도록 뛰어오른다. 말의 고삐를 쥔 듯한 동작으로 질주한다. 경주마가 따로 없다. 등살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언제 어디서든 꺼내 쓸 수 있는 조커 카드이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댄스파티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대륙에서 온 친구들이 우정을 나눈 장기 하우스
토요일 아침 덜 깬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공복을 달래러 일어난 친구들과 부둥켜안으며 인사를 한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함께 발을 맞추었는데 오래간만에 정든 동무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몸의 리듬을 나누는 즐거움은 삶의 리듬을 공유하는 기쁨과 맞닿는다. 따사로운 포옹은 마음의 온도를 어젯밤의 열기만큼 끌어올린다.
-어제 정말 최고였어! 너만의 무브(move)가 있던데. 맘에 쏙 들어.
춤을 잘 추던 못 추던 움직임에는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다. 글씨가 마음을 비춘다면 춤은 삶을 즐기는 태도를 보여준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살사를 배워볼까? 윌리엄은 등을 토닥이며 힘주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