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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여, 당신의 방랑이 아름답길 바라요

@짐바브웨

by 지수


- 짐바브웨 달러 사세요!

빅토리아 폭포를 보러 잠비아에서 짐바브웨 국경을 넘자 한 뭉텅이의 지폐를 든 청년들이 말을 건넨다. 진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흥정을 시도한다. 거절의 표시를 하자 휘황찬란한 숫자를 보여준다.

- 무려 100조 달러예요. 요즘 구하기 힘드니 지금이 기회예요!

소년의 보물은 관광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옛 짐바브웨 달러이다. 영(0)이 열네 개나 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휴지 조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짐바브웨의 경제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1990년대 정부는 외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를 마구잡이로 찍어냈다. 물가가 폭등하면서 통화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늦게 초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화폐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 또한 녹록지 않았다. 백억 달러의 가치는 고작 달걀 세 알이었다. 현재는 자국 통화를 폐기하고 미국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 붕괴된 국가 경제는 자국민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고 생계를 위한 이주가 줄을 이었다. 그렇게 짐바브웨 국민들은 그 옛날 팔레스타인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타국을 떠돌던 유대인처럼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관광상품으로 전락한 옛 짐바브웨 달러가 마그네틱 사이에 걸려 있다.


빅토리아 폭포가 자아낸 물안개가 희미해진다. 파아란 물웅덩이가 모래알만 해지자 기장은 짐바브웨 쪽으로 방향을 튼다. 가방을 정리하는데 이 주 전 잠비아행 비행기에서 받은 명함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뚫어져라 살피다가 그날과는 사뭇 다른 온도로 창밖을 내다본다.

- 이쪽이에요! 국제선으로 환승하려는 거죠?

탄자니아의 휴양지인 잔지바르에서 잠비아로 이동하려면 대도시 다르에스살람을 거쳐야 한다. 대기 시간은 짧은데 공항 내 안내 문구가 명확하지 않아 허둥대는 찰나였다. 엉뚱한 창구 앞에서 시계만 빤히 보며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오른편을 가리키며 서두르라는 사인을 보낸다. 가방을 고쳐 메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겨우 탑승 시각에 맞추어 도착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하고 앉는데 어라, 옆자리에 서류철을 내려놓는다. 이 무슨 우연인가. 서로의 티켓을 보여 주며 소리 낮추어 킬킬 댄다.

- 같은 항공기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 아프리카는 비행 편이 적어요. 이때 출발한다면 짐바브웨, 아니면 잠비아가 틀림없죠.

승객이 적은 아프리카에서는 여러 경유지를 거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는 자가 환승 시스템을 주로 활용한다. 다르에스살람을 떠난 기체는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를 들른 뒤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 착륙할 예정이다.


- 아치라고 불러요. 짐바브웨 사람이고 잔지바르 호텔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 출신을 꽤나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대다수는 타국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경우이다. 그들은 잔지바르 같은 관광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처럼 부유한 나라에 주로 자리를 잡는다. 짐바브웨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고 다양한 부족이 어우러져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모어가 아닌 영어로 배우고 소통한다. 아프리카의 동남부 대부분이 영국 연방에 속하는 만큼 영어는 관광과 생활 전반에서 쓰임이 많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짐바브웨인이 여러모로 적격인 셈이다. 아치 역시 일거리를 찾으러 잔지바르에 터를 잡았다. 가족들은 본국에 살고 있으니 기러기 아빠로 생활 중이다.

- 잔지바르는 어때요?

-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잖아요. 안전하고 근무 환경도 좋아요. 그래도 언젠가 짐바브웨로 돌아가야죠.

그는 잔지바르에서의 삶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만 여전히 고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


다르에스살람을 떠난 비행기는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 상공을 맴돈다. 창밖은 황톳빛 대지를 적나라하게 비춘다. 아스팔트 깔린 고속도로, 빼곡한 고층빌딩, 깔끔하게 정돈된 공항을 기대했다면 보기 좋게 비웃음을 당하리라. 남미나 인도, 아프리카처럼 비교적 개발이 늦은 곳들을 방문했지만 이렇게 어수선한 풍경은 처음이다. 한 나라의 수도가 맞나 의구심이 든다. 모래사장 위에 지어진 듯 도시 전체는 흙먼지에 덮여 있다. 격자 모양으로 나눈 구획은 체계가 없어 주요 도로와 골목을 구분하기 어렵다. 적잖이 당황해 무어라 묻고 싶은데 아치는 짐을 정리하며 작별 인사를 한다.

- 집은 빅토리아 폭포 근처인데 친척을 만나러 하라레로 가야 해요. 일정이 맞았다면 소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줘요.

명함과 SNS 아이디를 넘겨주고는 오랜만에 만날 가족 생각에 들뜬 모습으로 기내를 빠져나간다. 질문 거리가 산더미 같이 쌓이는데 물을 길이 없다. 잠비아에 도착하니 즐거운 여행을 빌어주는 아치의 메시지가 와 있다. 그로부터 이 주가 흐른 오늘은 잠비아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난다. 동일한 명함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이전보다 많은 의미를 읽고 있다.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 도시인 리빙스턴에서 보름 가까이 지내면서 어려움에 처한 짐바브웨의 상황을 수차례 체감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한참을 주저하기도 했다. 기댈 데 없는 그들은 디아스포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


이번 여행의 종착지는 아프리카의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름과 달리 아프리카가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간 종단을 하며 방문한 여타 국가들과 생활수준이 확연히 다르다. 인천 공항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규모와 서비스의 질이 압도적이다. 근 한 달 만에 만난 문명의 향기에 어색해하며 우버 앱에 접속한다. 여행 중 처음으로 이용하는 우버 택시이다. 케이프타운 시내를 가로지르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달팽이처럼 도는 고가도로와 잘 잡혀있는 신호체계,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높다란 스카이라인은 유럽을 연상하게 한다.

- 여기는 아프리카 같지 않아요.

드라이버는 창밖을 정신없이 내다보는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댄다.

- 유럽이나 캘리포니아와 분위기가 비슷하죠? 저도 처음 왔을 때 충격받았답니다.

케이프타운 토박이는 아닌 모양이다. 러시 아워로 멈춘 거리는 그의 이야기로 메워진다.


- 저는 짐바브웨 사람이에요. 대학을 다니다 휴학을 했어요. 학비를 낼 수 없었거든요.

중고등학교 이수율이 낮은 짐바브웨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걸 보면 드라이버는 우수한 인재일 테다. 학업에 매진하거나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직장을 찾아야 마땅한데 현실의 벽에 부딪힌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처음에는 학비를 벌 목적이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돈을 손에 쥐면서 근근이 생활하는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생겼다고 한다. 마치 육칠십 년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 케이프타운의 우버 기사들 중 짐바브웨 출신이 엄청 많아요. 사정이야 크게 다를 바 없죠.

이곳에도 그와 같은 젊은이들이 고달픈 삶을 버텨내고 있나 보다. 먼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애환을 가슴에 묻어둔 채로. 섣부른 위로나 응원을 전하기도, 그려지지 않는 희망을 불어넣기도 망설여진다. 그저 묵묵히 귀를 기울인다. 드라이버는 짐을 내리며 해사한 미소로 악수를 청한다.

- 당신의 여행이 아름답길 바라요.

떠도는 운명이 꼭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의 의지이든 그렇지 않든 그는 자신의 시간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의 무운을 빌어본다. 디아스포라여, 당신의 방랑이 아름답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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