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 자리한 도시 케이프타운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한겨울에도 반팔에 외투 하나만 걸치면 거뜬하다. 일 년 내내 서핑이 가능할 정도로 온난하지만 적도 부근의 나라들과 달리 찌는 듯한 더위는 없다. 아프리카의 유럽이라 불리는 까닭 중 하나는 쾌적한 생활을 만끽하게 하는 지중해성 기후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날씨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정학적 위치는 축복과도 같다. 케이프타운이 속한 케이프 반도는 아프리카 대륙의 끝자락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양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개방성은 무역과 교류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열강들이 인도로 가는 가장 짧은 항로인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운송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만큼 지리적 이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름이 내려앉은 테이블 마운틴은 쉽사리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해안도로로 나오자 유리창이 몸을 덜덜 떤다. 파도는 바람을 등에 업고 세차게 부딪친다. 방파제 역할을 하는 테이블 마운틴의 품을 벗어나니 강풍이 내리치는 세상의 끝에 와있음을 실감한다. 케이프타운 도심은 정상부가 평평한 식탁 모양의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에 둘러싸여 있다. 대개 산의 모양은 높이에 따라 점차 가팔라져 꼭대기가 뾰족하다. 반대로 테이블 마운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어지다 1,087 미터 고도에서 널따란 평지가 펼쳐진다. 과거 뱃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었을 정도로 도시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띄는 독특한 지형이지만 정복하기란 쉽지 않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는 날이 많다. 힘겹게 산을 타도 구름이 걸려 있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산정이 널찍하다 보니 구름이 쉬었다 가나 보다. 일주일 가량 케이프타운에 머물렀지만 도무지 입산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도 식탁보처럼 구름이 머리를 덮고 있다. 신이 빚은 식탁이라는 별칭처럼 테이블 마운틴은 케이프 반도인에게 영산(靈山)으로 받들어진다.
케이프 반도에서는 거센 바람을 이겨낸 각양각색의 바위산을 볼 수 있다.
초승달 모양의 해변이 나오자 바람의 호흡이 차분해진다. 부촌으로 알려진 캠스 베이는 오목한 만에 위치한 마을이다. 모래사장을 파고드는 파도는 한층 힘이 꺾여 있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올라서자 병풍처럼 둘러싼 테이블 마운틴의 척추가 보인다. 도심에서 보이지 않던 뒷면은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이겨낸 봉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약한 부분은 부서지고 단단한 암석층만 남아 형태가 제각각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닿은 선은 사자의 머리카락으로 이어진다. 테이블 마운틴의 줄기인 라이온스 헤드(Lions Head)는 비탈진 꼭대기가 사자의 머리와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세모꼴로 흘러내리다가 허리께에서 볼록하게 솟아오른 시그널 힐(Signal Hill)을 만난다. 꼬리는 바다에 담갔다가 끝만 살포시 물 밖으로 낸다. 털 송이는 자그마한 섬으로 떠오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가 18년간 투옥되었던 로벤섬이다. 찬란한 풍경은 재미난 상상을 자극해 그림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사자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라이온스 헤드의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면 등허리 부분에서 완만한 시그널 힐을 만날 수 있다.
이리저리 들고 나는 복잡한 해안선에 핸들은 쉴 겨를이 없다. 짙은 수평선은 어디 하나 걸리는 데가 없다. 탁 트인 대서양은 세상의 끝은 종점이 아니라 무한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고기잡이 배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물결이 쉬어가는 부둣가에는 막 귀향한 참치 배가 뭍으로 신선한 고기를 내리고 있다. 캠스 베이가 휴양지라면 후트 베이는 어부의 밭이다. 선착장에는 생선 비린내와 짠 내가 정겨움을 더한다. 바다 사람들 사이로 미끄덩한 움직임이 있다. 용케 높다란 선창까지 올라왔다. 나무 널 위에는 어깨 높이의 물개가 진군하고 있다. 이 녀석을 보러 왔는데 벌써 만나버렸다. 손쉽게 먹이를 얻으러 온 걸까? 연한 갈색이 도는 회색빛 털은 물기를 머금어 검정색에 가깝다. 배를 깔고 누워 햇볕에 몸을 말린다. 앞 지느러미를 세워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가 퍽 배가 고픈 듯하다. 양동이 안에서 펄떡 거리는 생선을 보더니 흐리멍덩한 눈빛에 생기가 돈다. 사냥에 실패해 한동안 굶주렸나 보다. 익숙한 장면인지 어민들은 제 갈 길 가기 바쁘다.
선원의 출항 신호와 함께 하얀 보트가 항구를 떠난다. 물개섬으로 가는 여정은 속을 까뒤집을 정도로 험난하다. 물살의 힘을 덜어내는 만을 벗어나자 서른 명의 무게를 짊어진 유람선이 휘청댄다. 갑판에 나와있던 승객들은 매서운 파도를 피해 안으로 숨는다. 속이 메슥거린다. 출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뱃멀미를 하려 한다. 단순히 약한 비위 때문이 아니다. 거친 물살은 뱃머리를 뛰어넘는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에 머리와 옷자락이 젖어 닿은 자리의 색이 짙어진다. 용감하게 맞서는 자는 바닷물 샤워를 각오했을 테다. 선미로 향하는데 발이 탭댄스를 춘다. 똑바로 걷기는커녕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잠시 잔잔한 틈에 쏜살같이 달려간다. 안전 바를 두 손으로 꼭 쥔다. 놀이기구가 따로 없다. 집채 만한 물결이 바닥을 밀어 올리면 몸이 붕 떴다 추락한다. 한참을 날아올랐다 너울의 최저점에 떨어지자 모두의 소리가 멎는다. 비명도 환호성도 없이 벌린 입 사이로 빈 울림만 그득하다. 짜릿한 바다의 한 방이다.
물개섬의 주인은 방문자를 흘긋 보곤 단잠에 빠진다.
아무리 가도 망망대해이다. 무언가 나오기는 할까? 삐죽한 산봉우리는 작아지는데 위험천만한 물색만 시야 가득이다. 특별한 무엇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릴 무렵 저 멀리 까만 돌무더기가 보인다. 넘실대는 파도 사이로 물개섬이 등장한다. 섬이라기에는 규모가 협소하다. 암초는 본디 밝은 빛인데 해조류가 덕지덕지 붙어 시커멓게 보인다. 그나마 환한 부분에는 바위의 주인이 널브러져 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덩어리 져 있는 까망 물개들이다. 빈 틈 없이 따닥따닥 붙어 있고 하나 위에 또 다른 하나가 포개져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아래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함은 아닐 런지. 대양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암석은 물개 무리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머리를 젖혀 자신의 영역 가까이 접근한 이방인을 엿본다. 경계심이 멎자 틈바구니 속으로 다시 머리를 들이민다. 소답한 물개마을은 제멋대로 인 듯하면서도 기묘한 질서가 있다. 넓은 범위를 차지하기 위해 밀어내거나 다투지 않는다. 심한 해류 속에서 헤엄을 치고 사냥을 하는 일은 제 아무리 물개라도 간단치 않다. 뭍까지는 한참 멀고 반대 방향은 가늠조차 어렵다. 척박한 환경에서 우연히 찾은 자그마한 공간은 그 자체로 든든한 안식처가 된다.
섬 주위를 맴돌다 귀환하는 뱃머리에서 물끄러미 대륙을 바라본다. 처음으로 대서양을 빙 돌아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의 감상을 그려 본다. 끝없는 대해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위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뾰족한 해결책을 세울 수 없는 막막함, 육체적 질병과 내면 깊은 고독과의 싸움, 동고동락한 동료를 잃은 슬픔 그리고 안락한 삶과 뒤바꾼 선택이 실패로 종결되지는 않을런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루가 다르게 밀도를 높이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푸른 꿈으로 부푼 첫 마음을 되새긴다. 예측 불가능한 시련을 무릅쓰는 용기, 남루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으려는 욕망, 세상에 없는 새로움에 도전하는 포부,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목마름은 망설임과 좌절, 향수(鄕愁)를 집어삼킨다. 뒤엉키는 감정의 실타래를 끌어안고 마침내 다다른 세상의 끝은 벅차오르는 환희와 무한한 가능성을 선물해 주었으리라. 더욱이 이곳은 육지와 바다 할 것 없이 풍요로움을 품은 땅이다. 요동치는 파도 위에서 탐험가의 심장으로 세상의 끝을 바라본다. 세상의 끝은 아름답고 무한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