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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27. 2021

기차에 내 자리가 없다

차표에 호차와 좌석이 없다면 어디에 앉아야 하나



 인도를 꿈꾼다면 한 번쯤은 기차 여행을 떠올린다. 광대한 대륙을 종으로 횡으로 가로지르며 달리고 침대칸에 누워 덜컹이는 바퀴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내는 낭만을 그리면서 말이다. 한편으로는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리는 살인적인 이동 시간과 악명 높은 연착과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위생적인 환경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이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선로 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각 나라의 지형과 기후, 인구 분포는 교통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인도에는 비행기, 열차, 버스, 지하철, 택시, 트램, 릭샤(삼륜차), 오토 릭샤 등 다양한 이동수단이 있다. 그중 가장 편리하고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대중교통은 단연 철도다. 인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나라로 그 면적이 한반도의 15배에 달한다. 50시간이 거뜬하게 걸리는 먼 거리를 저렴하고 빠르게 이동하려면 기차만 한 게 없다. 철길은 전국 방방곡곡을 연결하여 인도인의 발이 된다. 


철도는 인도 전역을 그물망처럼 연결한다. 


 경적음이 합창을 한다. 택시와 릭샤 무리가 물밀듯 밀려온다. 이미 역전은 포화 상태라 들고 나지 못한다. 요지부동인 도로 못지않게 역내도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티루바난타푸람은 케랄라의 주도로 대도시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은데 역사의 크기는 우리나라 시골 버스정류장만 하다. 혼잡함을 줄이기 위해 작은 기차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발권을 진행한다. 매표소 직원에게 승차권을 사거나 무인발급기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기계로 표를 끊는 장면에 독특한 구석이 있다. 자동 매표기 앞에 선 역무원이 탑승객의 행선지를 듣고 대신 버튼을 눌러준다. 시간을 단축시키고 일손을 덜려고 사용하는 자동화기기는 본래의 목적을 잃은 듯하다. 게다가 현장 발권보다 오래 걸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시스템이다. 이럴 때 외국인은 면대면 구매가 제일 속 편하다.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고개를 빼꼼 빼고 현지인이 표 끊는 모습을 구경한다. 


 인도의 기차는 다양한 등급이 있다. 크게 침대칸과 좌석, 입석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안에서도 에어컨의 유무와 인원수에 따라 세부적인 클래스로 구분한다. 도착지 바르깔라(Varkala)까지 1시간 거리라 좌석 칸을 사야겠다. 하지만 역무원은 긴 말 없이 슬리퍼(Sleeper, SL)를 건넨다. 슬리퍼는 침대칸 중 가장 아래 등급으로 에어컨이 없는 게 특징이다. 간단한 설명조차 없어 까닭을 물으려고 입을 뗐다가 곧 오므린다. 원하는 자리가 매진되었을 수 있고 온라인 예약을 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다. 크게 가격 차이가 나지 않고 뒤쪽에 어마 무시한 인파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루피(인도 화폐)를 내민다. 


승강장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차표와 전광판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북적대는 대합실을 벗어나 승차장으로 향한다. 철제 구름다리 아래로 기다란 회색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객차 한 량이 길고 대 수도 많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의 스케일이 실감 난다. 플랫폼에는 하늘색 가로 줄무늬로 가운데를 꾸민 파란색 열차가 정차 중이다. 칸마다 등급을 나타내는 글씨가 힌디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승강장 기둥에는 빨간 원 중앙에 파란 가로선이 있는 표지판이 자리한다. 영국의 지하철 무늬를 본 따 만들었는지 판박이다. 윗 반원에는 케랄라의 말라얄람어, 중심선에는 힌디어, 아래 반원에는 영어로 역의 이름을 표시한다.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 지배의 흔적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여전히 봄베이, 코친과 같은 옛 지명으로 부르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운전대를 오른쪽에 두고 좌측통행을 원칙으로 한다. 사회제도부터 일상 속 작은 면면까지 녹아들어 있는 역사를 목격할 때마다 비슷한 과거를 가진 한국인으로서 묘한 감정이 든다.   


인도 기차역의 표지판은 영국 지하철 기호를 빼닮았다.


 전광판에서 뉴델리행 급행열차의 시간을 확인한 후 승차권을 꼼꼼하게 살핀다. 표에는 영어와 힌디어, 말라얄람어가 뒤섞여 있다. 내 눈에 그림인 글자는 제외하고 숫자와 영어를 공략한다. 날짜, 출발지와 도착지, 객실 등급과 금액, 인원수와 기차 번호까지 단번에 찾는다. 완벽하다며 손뼉을 치는데 무언가 께름칙하다. 객차 번호와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힌디어와 말라얄람어로 적은 건 아닐는지 도움을 청해 본다.

- 실례합니다. 객실과 좌석이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어요?

- 음, 티켓에 안 나와 있네요.

자리가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럴 리 없다며 승객들을 붙잡고 차표를 봐달라며 사정한다. 모두 하나 같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같은 답을 반복한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르고 입은 쉴 틈 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잠시 후 기적 소리가 가까워지고 선로 위로 무시무시한 기차의 얼굴이 번뜩인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호차의 이름을 정독한다. 인도 기차는 등급만 아홉이고 등급별 객차도 여러 대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열차를 빠짐없이 살피며 기도한다. 제발 슬리퍼 칸이 하나이기를. 끄트머리에서야 고대하던 슬리퍼가 등장한다. SL1, SL2, SL3…… 숫자 6을 보니 체기가 있는 듯 속이 꽉 막힌다. 제시간에 탑승하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차량이 온전히 멈추길 기다리던 승객은 끈질긴 요청에 잠시 고민하더니 숫자 1을 가리킨다. 일단 타고 나중에 이동하자며 막무가내로 1호차에 오른다. 객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다들 부지런히 짐을 정리한다. 에라 모르겠다며 아무 데나 앉는다. 주인이 나타나 비키란다. 


 나 빼고 다 자리가 있다. 망부석처럼 마냥 통로에서 굳어있을 수는 없다. 울먹이는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통의 인터뷰를 시작한다. 답변은 한 치의 오차가 없다. 상황을 지켜보던 여인은 안 되어 보였는지 말을 붙인다.

- 여기서 종착역 뉴델리까지 50시간이 넘게 걸려요. 당신은 바르깔라까지만 가니까 한 시간 남짓이겠죠? 굳이 좌석을 지정할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빈자리라면 아무 데나 원하는 곳에 앉아도 괜찮아요!

대혼란을 끝낼 현자가 나타났다. 명쾌한 해석에 땡큐 세례를 한다. 출발지라 객실은 아직 여유 공간이 많다. 차표를 흔드는 탑승객에 밀려 계속 메뚜기처럼 이사를 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열차가 출발하고 역무원이 승차권을 검사하러 돌아다닌다. 혹시나 쫓겨날까 숨을 죽이고 시선을 피한다. 그는 호차도 지정석도 없는 티켓을 보고는 무심하게 떠난다. 정녕 상관없었던 게냐. 


객실의 한 칸은 작은 방이다. 미우나 고우나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을 부대껴야 한다.


 속 끓이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야 객실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슬리퍼 등급은 통로를 기준으로 가로로 놓은 침대와 기차 벽면에 붙인 세로 침대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 우등 버스에서 2-1 좌석 구조와 비슷한데 두 명이 함께 앉는 자리에 가로 침대를 설치한 형태다. 한 칸은 삼 층 침대가 마주 보고 있어 여섯 명이 함께 쓴다. 낮에는 보통 이 층을 접어 등받이로 쓰고 일 층에 함께 앉는다. 따로 각 칸을 구분하는 문이나 커튼이 없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세로 침대는 이 층짜리지만 승객의 통행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훨씬 불편하다. 협소한 공간에도 있을 건 다 있다. 에어컨은 없지만 천장에 선풍기가 있고 철창이 달린 창문이 있다. 벽면에는 거울과 옷걸이, 콘센트가 있고 창가 아래에는 펴고 접을 수 있는 작은 식탁이 있다. 통로 쪽에는 사다리와 손잡이가 있어 위층으로 오르내리기 편리하다. 널널한 침대에 다리를 쭉 뻗으니 그간이 긴장이 사르르 녹는다. 건너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열차 문을 열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저속으로 주행하면 무임승차도 어렵지 않겠다. 


 짜이 왈라가 객차를 돌며 장사를 한다. 짜이는 인도식 밀크티로 진한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만든다. 인도 전역에서 즐겨 마시지만 특히 북부에서 국민차라 할 만큼 사랑받는다. 짜이를 한 잔 할까 하다가 통을 들고 기차 안팎을 떠도는 커피 장수와 눈을 맞춘다. 남인도에서는 그래도 커피다. 남부는 일 년 내내 무더운 열대기후로 커피나무를 재배하는데 안성맞춤이다. 우유맛이 짙게 나는 달짝지근한 커피는 고된 하루를 위로한다. 상인 못지않게 승객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분주하다. 노인은 장사꾼에게 세모 모양의 사모사를 산다. 한 입 베어 물면 튀김옷 안쪽에 커리와 야채, 향신료와 으깬 감자 범벅이 보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인도식 만두튀김으로 대표적인 디저트이다. 간식을 먹는 무리 옆으로 한 가족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식사를 한다. 손수 싸온 커리와 밥을 오른손으로 맛있게 비빈다. 인도의 음식은 반죽한 빵을 뜯어먹거나 묽은 커리에 찍어 먹는 게 많아 수저나 포크, 나이프보다 손을 사용하는 것이 더 간편하다. 낯설지만 문화권마다 다른 식습관을 체험해 보면 그 까닭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짜이왈라를 보면 어릴적 기차간에서 손수레를 끌며 주전부리를 팔던 행상이 떠오른다. 


 객차는 만남의 장이다. 긴 시간을 함께 할 동지와 얼굴을 트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남인도는 북부에 비해 관광객이 적다. 아시아 동쪽 끝에서 온 나에게 호기심을 느끼는지 이목이 집중된다. 한 아주머니가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는다.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식구를 향해 눈짓을 보낸다. 구경하던 가족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어색한 우리 둘을 관찰하고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적극적인 청년은 마주 앉아 이것저것 묻는다. 어디를 가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여정을 살피고 추천과 조언을 해준다. 눈치를 보며 기회를 엿보던 소녀는 쪼르르 달려와 나는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세심하게 답하고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며 시간과 정을 나눈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바퀴가 쇳소리를 낸다. 자신의 땅을 떠도는 이방인에게 다들 축복을 빌어준다. 바르깔라 역을 나서며 친구의 물음에 미소로 화답한다. 이곳이 마음에 드냐고요? 늘 예상 밖의 일이 터져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당신들 덕분에 웃으니 마음에 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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