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 다녀왔다. 이건희 컬렉션은 예약하기가 까다로워 피케팅(티케팅이 피가 튀긴다는 뜻)을 해야 한다. 그만큼 경쟁률이 치열한데 관람하고 나니 왜 많은 사람들이 찾는지 알겠다. 개인의 소장품이라 믿기 어려운 규모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백남준 화백과 서양사를 수놓은 모네의 작품까지 소개하고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이 빼꼼 얼굴을 내밀 때마다 수집가의 안목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구성과 유물, 회화, 자기, 조각, 생활용품을 가리지 않는 다채로운 형식이 특히 인상적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이중섭의 <황소>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나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분청사기다. 분청사기는 회색 점토에 백토를 덧 바른 후 유약을 입혀 구워 만든다. 어두운 바탕의 토기를 사용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탁한 푸른빛이나 노란빛이 돈다. 화려한 청자나 청아한 백자와 비교하면 분청사기는 다소 거칠고 투박하다. 대개 고려하면 청자, 조선하면 백자라는 인식이 있는데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양식이다. 청자와 백자의 그늘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분청사기는 특색이 다른 두 자기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이는 도자기의 제작 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늬를 만들 때 선을 파고 그 틈에 다른 색깔의 흙을 넣는 기술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닮았다. 표면에 백토를 바르는 분장은 백자의 탄생을 이끌었다. 여러 기법이 교차하며 발전하던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백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준다.
유려한 청자와 담백한 백자 사이에는 분청사기가 있다.
분청사기가 꽃을 피운 시기는 세종 대이다. 당시 조선은 개국한 지 겨우 서른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신생 국가 조선은 유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신분 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노비 출신의 장영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공정한 판결이 이루어지도록 재판을 세 번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출산을 한 노비가 휴가를 쓸 수 있게 했다. 실력 있는 학자를 양성하고 교류하기 위해 집현전을 설치했다.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를 제작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 혼천의와 간의, <칠정산 내외 편>을 만들어 중국이 아닌 한양 중심의 천문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과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를 소개한 <향약집성방>을 편찬했다. 말과 글이 달라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어려운 백성을 위해 새로운 글자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회청색과 회황색의 분청사기에는 정감이 어려 있다.
분청사기를 관찰하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세종 대가 떠오른다. 시기적으로 겹치기도 하거니와 풍기는 분위기에 닮은 구석이 있다. 분청사기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친다. 청자와 백자의 가교 역할을 하며 두 자기의 특성을 모두 품으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뽐낸다. 조선 초기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두려움이 없었고 다양한 분야가 함께 발전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선진 문명이라 일컫던 중국에 기대지 않고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기술과 문화를 창조했다. 성장과 발전의 과정에는 넘어지고 부딪치고 깨지는 일이 발생한다. 좌충우돌하며 독자적인 색깔을 써 내려간 분청사기와 조선의 태동은 가슴을 뛰게 한다. 변화를 밑거름 삼아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분청사기를 만나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