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해봤는데, 할아버지도 이제 친구가 새로 필요한 것 같아.”
김영배는 무릎을 움켜쥐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 골목길은 쌍문동 토박이인 그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역이 있는 대로변에서 한참 벗어나 주택가를 가로질러서도 골목길은 이어졌다. 그는 지도 어플을 내려다보고 끙, 소리를 냈다.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파란 점이 전체 경로의 3분의 2 지점에서 깜박거렸다.
무릎이 항의라도 하듯 욱신거렸다. 평소에 집 안에서만 지낸 탓에 체력이 부족했다. 그는 오르막길 중턱에 멈춰서서 과연 길을 따라 더 가야할지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다.
72년 인생에서 손꼽히는 곤란한 순간이었다.
영배를 이런 곤경에 빠트린 범인은 손녀 해인이었다. 그에게 지도 어플 사용법을 알려준 해인은 열한 살 특유의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혼자서 찾아갈 수 있지?”
“음. 잘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해인이 종알종알 알려주는 소리가 좋아 그렇게 대답했다. 덕분에 김영배는 오등로 71-3번지까지 가는 방법을 장장 20분에 걸쳐 다시 들어야 했다. 이번에 설명을 마친 해인은 이해했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에 두툼한 공책을 쥐어줬다. 페이지 중간마다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한테 물어볼 만한 건 웬만하면 다 여기 적혀있어. 그러니까 안심해.”
“꼭 어디 떠나는 것처럼 그러네.”
무심히 던진 영배의 말에 해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갈래 포니테일에 달린 사과방울 머리끈만큼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 몰랐어? 나 2주 동안 영어 캠프 가잖아. 필리핀으로.”
김영배는 몰랐다. 설명을 구하려 해인이의 엄마, 즉 그의 딸을 찾는데 해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엄마랑 아빠랑 싸웠단 말야. 말 꺼내지 마.”
“필리핀에서 꼴랑 2주 보낸다고 영어 실력이 쑥 늘면, 세상 사람들 다 필리핀 살게? 꼬맹이한테 뭘 시키는 건지.”
영배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해인이 방긋 웃었다.
“엄마도 똑같이 말했는데. 어쨌든 나 가 있는 동안 꼭 그 집에 찾아가봐야 해.”
“그 집에 누가 있는데?”
“버드랑골 백 영감.”
나흘 뒤 오르막길을 오르기로 결정한 김영배는 이를 갈았다. 버드랑골 백 영감. 대체 어떤 사람이 아이한테 자신을 그따구로 소개한단 말인가.
만나면 분명하게 따질 생각이었다. 해인을 어떻게 만났는지, 뭘 하려고 꾀어냈는지, 무엇보다 해인의 머릿속에 든 그 ‘친구’와 관련된 생각은 왜 하게 만들었는지.
영배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해인이 했던 말만 생각하면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는 보통 토요일을 일주일 중에 제일 좋아했다. 손녀 해인이 엄마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아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가을부터 해인은 짐만 할아버지 집에 떨궈 놓고 친구를 만나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로 2시간 거리에 사는 애가 쌍문동에 무슨 친구가 있다고.
김영배는 그때부터 뭔가 수상쩍다 여겼다.
지난 토요일에 해인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큰 결심을 한 얼굴이었다. 밥을 먹고 제 엄마가 급한 원고에 매달려 있는 동안 해인은 서재에 있던 영배를 찾아왔다. 그래놓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할아버지는 친구가 나밖에 없어?”
영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녀의 기분에 맞춰준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내와 사별한 이후 그는 지난 30년을 인간 관계에서 고립된 채 살았다. 불만은 없었다. 딸을 홀로 키운 것에 가끔 자부심도 느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손녀가 있었다.
김영배가 보물같이 아끼는 바로 그 손녀는 심각한 얼굴로 탁자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환자를 대하는 상담사처럼 신중하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할 수 있는 가장 엄숙한 태도로 해인이 물었다.
“정말이야? 윤서네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탁구를 친대. 도희네 할아버지는 기원에 가고. 할아버지는?”
“나한테는 해인이가 있지.”
해인은 생각에 잠긴 비음을 길게 냈다. 영배는 이제 초조해졌다.
“할아버지한테도 친구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
“응.”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해인이 답했다. 김영배는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를 독점하려는 손녀의 응석인 줄 알았는데 해인의 의도는 전혀 달랐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할아버지도 이제 친구가 새로 필요한 것 같아.”
영배가 미처 대꾸할 틈도 없었다. 해인은 머릿속으로 이미 온갖 복잡한 고민과 결정을 해결한 듯 당당하게 선언했다.
“내가 필리핀 다녀올 동안 친구를 만들어. 알겠지? 할아버지한테 꼭 필요한 일이야.”
해인과 달리 영배는 머릿속에 든 복잡한 고민과 결정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먼 옛날에나 썼던 반항적인 말투가 나왔다.
“못 만들 수도, 아니 안 만들고 싶을 수도 있잖아. 할아버지한테 필요한 일은 할아버지가 알아서 할게.”
“그럼 새로 친구 만들기 전까지는 나랑 못 만나는 걸로 알아.”
김영배는 당황해서 해인을 빤히 응시했다. 해인도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아이 쪽은 아주 단호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물어봤더니 할아버지는 30년간 외톨이였어서 친구 사귀는 법도 모를 거라고 엄마가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계획을 짜왔어.”
그리고 해인은 계획을 설명했다. 그녀의 계획에 따르면 김영배는 한 달 안에 해인이 친구로 사귄 어떤 할아버지하고 친해져야 했다.
친구를 사귀는 다섯 가지 비법은 간격을 두고 하나씩 문자 메시지로 보내줄 것이다. 김영배는 그 비법을 따라야 하고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
해인이 공책에서 읽어 준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 조건>
1번. 해인의 비법을 상대에게 공개하지 말 것
2번. 해인이 보낸 문자 메세지를 보관하지 말 것
3번. 엄마아빠에게는 비밀로 할 것
4번. 진심을 다할 것
5번. 비법을 모두 실천하기 전까지는 해인을 만날 수 없음
영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인은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 할아버지는 여기 살아. 지도 어플 보는 법 알아?”
영배의 찌푸린 눈썹을 부정적인 대답으로 여긴 해인은 지도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브리핑을 마쳤다.
“참, 버드랑골 백 영감도 외톨이야. 둘이 친구하면 딱 되겠다.”
그 상황에서 김영배는 겨우 한 마디를 뱉어냈다.
“해인아. 세상 일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김영배에게는 안타깝게도,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당장 토요일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버드랑골 백 영감을 보겠다고 지도를 따라 걷고 있을 줄 몰랐다.
서재를 나가는 해인을 김영배가 불렀다.
“정말로 친구 못 사귀면 할아버지를 안 만날 거야?”
해인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순진한 얼굴로 영리하게 웃었다. 뺨에 엄마를 닮은 보조개가 패였다.
“당연하지. 그래도 걱정마. 할아버지라면 꼭 성공할 테니까.”
서재 문이 나직한 달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김영배는 어두운 방에서 고뇌에 빠졌다.
현재 김영배는 전혀 고뇌하고 있지 않았다. 오르막길을 오르며 쌓인 분노는 모두 버드랑골 백 영감에게로 향했다.
만나기만 하면. 그는 그렇게 되뇌이며 어느새 정체 모를 노인과의 만남을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만나기만 하면 내가 혼구녕을 내줄 테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지도에서 파란 점이 깜박거리며 꾸준히 움직였다.
마침내 김영배는 어느 단독주택 대문 앞에 도착했다. 칠을 새로 한 대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그가 씩씩거리며 다가간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슬리퍼가 돌 계단에 끌리는 소리였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모아온 분노는 다 사라지고 영배는 서둘러 뒷걸음질쳤다. 막상 수수께끼의 노인과 대면하려니 겁이 났다. 그는 헌 옷 수거함 뒤에 몸을 숨겼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현관 너머를 들여다봤다.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화단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아직 2월이었는데 회양목과 사철나무가 빚 바랜 녹색 잎을 간직하고 있었다.
노인은 경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연갈색 팔은 호스의 움직임을 유연하게 조종했다. 노인의 손목은 매우 가늘었다. 목도 마찬가지였다.
사슴,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여. 김영배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검은색 곱슬머리로 덮인 작은 뒤통수가 흥얼거림에 맞춰 느리게 흔들렸다. 그저 가벼운 가락이었는데 소리가 낮고 울림이 있었다. 김영배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에서 굴러다니던 비닐 봉지가 유난히 큰 소리를 내며 부스럭거렸다.
작은 노인이 퍼뜩 놀라 고개를 돌렸다. 사슴 같이 맑고 까만 눈이 김영배를 순식간에 발견해냈다.
김영배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오르막길을 도로 내려갔다. 무릎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세차게 뛰었다. 끔찍한 범죄라도 저지른 기분이었다. 그는 지도를 보지 않고 왔던 길을 쉽게 되짚어 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인의 콧잔등과 눈 밑에 점점이 박힌 주근깨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문 너머로 본 얼굴을 이루는 사소한 부분이, 남을 엿봤다는 부끄러운 마음과 별개로 자꾸 아른거렸다. 반반한 이마와 높은 코, 뺨 양쪽에 깊숙이 패인 세월의 흔적. 그리고 까만 눈도.
그날 김영배는 자리에 누워 밤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그 놀라서 동그래진 눈이 왜 해인을 떠올리게 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단 하나도 생각해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