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그 까맣고 놀란 기색이 깃든 눈동자가 김영배를 바라봤다.
해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영배는 핸드폰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서재 창문으로 게으른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아직 겨울이라 그 어떤 것도 충분히 달구지 못할 만큼 미적지근했다. 겨우 온기만 전하는 햇빛처럼 영배의 의지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어제 일을 떠오르면 양 볼이 홧홧해졌다. 손녀의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어주겠다고 남의 집 대문 너머로 집주인을 훔쳐보다니. 김영배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의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김영배의 인생 철학이었다.
그는 이 철칙이 삶에서 많은 부분을 이롭게, 더 낫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비웃는 오지랖 넓은 노인이 되지 않았고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일상이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그만의 일상을 지키며 살길 원했다. 아무리 제 아내와 딸을 똑 닮은 손녀가 발칙한 선언을 했어도 그랬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해인에게 전화를 건 것은 김영배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전화가 연결되면 무슨 말을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해인의 말을 재차 확인할 의도도 없었다. 다만 그는 하소연하고 싶었다. 친구는 필요 없다고. 그의 삶은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었고 충분히 즐거웠다.
이 평화를 깬 해인에게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은 김영배에게 새로이 자리 잡은 늙은이의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그걸 알아 해인은 전화를 안 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김영배는 달력에서 아직 남은 손녀의 출국일을 확인했다. 그가 마음을 딱 다잡고 통화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려던 참이었다. 책장 사이에 자리한 괘종시계가 정오를 알렸다. 해인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영배가 잔뜩 기대하며 열어본 문자는 이런 내용이었다.
<친구가 되는 비법>
1번. 직접 만든 음식을 들고 찾아가기
김영배는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오랫동안 일을 준비해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리고 해인은 제 할아버지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다.
가슴이 답답해 김영배는 보리차를 찾았다. 날이 찼지만 얼음까지 동동 띄웠다. 유리잔을 가득 채운 음료는 곧 목구멍에 들이부어졌다.
그는 서재로 돌아와 이번에는 좁은 공간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삼 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자꾸 책 제목들이 눈에 밟혔다. 그는 생각이 멋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뒀다.
렘브란트의 유령, 폴 크리스토퍼. 유산으로 남겨진 그림을 두고 벌어지는 멋진 모험 이야기다. 해인은 혹시 이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를 신나는 모험쯤으로 여기는 걸까? 할아버지의 마음도 몰라주고 말이다. 내가 죽어서 유령이 된다면, 꼭 골려먹여서 되갚아줄 테다. 김영배는 만지작거리던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았다.
천사와 악마, 댄 브라운. 말이 필요없는 걸작이지만 김영배는 불편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꼭 천사와 악마가 머릿속에서 싸우는 기분이었다. 천사는 물론 그였고 악마가 해인이었다. 당돌한 악마는 자꾸 속삭였다. 까짓것 해치워버리라고. 그의 부끄러움보다 손녀가 중요하지 않냐고.
반지의 제왕, J.R.R. 톨킨. 세 권짜리 책을 김영배는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 책에서도 반지가 자꾸 프로도를 유혹했지. 그러다가 결국 프로도는 해피엔딩을 맞이했고 반지는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해인을 불구덩이에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에게도 해피엔딩은 없었다. 해인의 선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을 흘려보내다간 하루가 다 갈 것 같았다.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김영배는 핸드폰을 다시 확인했다. 그가 보는 바로 그 순간 해인의 메시지가 산산조각이 나는 효과가 적용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는 당황해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예전에 해인이 아이폰의 새 기능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면 메시지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날리는 효과였다. 그때는 김영배도 좋다고 같이 웃었다. 새로운 기능의 피해자가 자신이 될 줄도 모르고. 시계 바늘은 이제 12와 2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영배는 핸드폰을 줍지 않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어두워진 화면에 비친 얼굴을 보며 그는 전날 꽁무니를 뺄 때의 초라함과 남자의 까만 눈을 곱씹었다. 분명 제 유전자 탓은 아닌 손녀의 고집을 욕하다가 소심한 자신을 욕했다. 해인에게 고집을 물려준 딸과 그 고집의 원인이 분명한 아내 생각까지 이르렀다.
그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오에서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다시 증상이 도졌다는 뜻이었다.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 여름, 무기력 증세를 보이고 우울증을 진단받은 직후였다.
“뭐라도 해야 해요, 김영배 씨.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김영배는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내가 보여주지. 김영배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부엌으로 향해 그는 밥통에 남은 밥을 퍼왔다. 직접 무친 나물과 마트에서 산 고추장,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얻은 참기름을 넣어 양푼 비빔밥을 만들었다. 원래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밥을 비비는 내내 배가 꼬르륵거렸다. 맛깔스럽게 섞인 비빔밥을 한 술 뜬 그는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밥솥에 물을 담아 놓으려고 통을 꺼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그는 서둘러 바람막이를 걸쳤다. 밀가루와 건포도를 사야 했다.
* * *
김영배는 다시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번에는 양 무릎 대신 술빵을 담은 락앤락 통을 움켜쥐었다. 긴장한 탓인지 손가락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쌍문역에서 주택가를 따라 올라가다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만두 가게에서 왼쪽, 손두부 집에서 오른쪽. 그리고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버드랑골 백 영감의 집이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몰랐는데 그 주변은 온통 단독주택 뿐이었다. 높은 담장으로도 부족한지 차고 문을 제외하면 길과 단차를 두고 건물을 세워놨다. 길과 정문이 바로 통한 집은 버드랑골 백 영감네 뿐이었다.
김영배는 심호흡을 하고 뻐근한 허리를 바로 폈다. 그리고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대화하게 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하던 참이었다. 예상과 달리 노인은 문을 직접 열고 나왔다. 문을 짚은 손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다시금 그 까맣고 놀란 기색이 깃든 눈동자가 김영배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쪽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길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내밀며 부르는 목소리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늙고 지친 길고양이가 된 김영배는 준비했던 말을 허겁지겁 꺼냈다.
“아, 김영배라고 합니다. 해인이가 보내서 왔어요. 해인이는 제 손녀인데. 음. 이곳 주소를 주면서 꼭 집주인 분을 만나라고 하더군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절대 나쁜 의도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고…전날 일은 사과드리고 싶군요. 그렇게 엿볼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횡설수설하다 김영배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 앞에 선 노인은 그를 더할나위 없이 수상쩍다 여길 것이 분명했다. 이상하고 미친 늙은이. 오르막길을 올라오며 설명을 꾹꾹 눌러담아 정리했으나 결과가 겨우 이렇다니 실망스러웠다. 해인에게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득했다.
그러나 상대는 다 이해한다는 기색으로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물러서서 대문을 조금 더 열었다.
“저는 백춘길이라고 합니다. 들어가서 이야기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