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홍차

김영배를 내보내고 백춘길은 문 앞에서 기다렸다.

by 두밥

어떻게 응접실 소파에 앉게 되었는지 김영배의 시간은 흐릿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백춘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홍차를 내오고 있었다. 그는 감사 인사를 하고 잔을 받아 들었다.


한편 백춘길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났다. 그는 대문 앞에서 나눈 짧은 대화 내내 김영배를 살폈다. 화단에 물을 주는 그를 김영배가 대문 너머에서 관찰했듯, 공평하게 찾아온 기회였다.


숱 많은 백발, 주먹코, 오르막길을 지나느라 발그레해진 뺨. 평균보다 조금 더 배가 나온 체형에 목티와 바람막이를 입었다. 그러나 백춘길이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락앤락 통을 꼭 감싸고 가볍게 떨리는 손. 그의 손보다 주름 많고 마디가 튀어나온 손이었다. 저 손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지만 그는 솔직해질 용기를 냈다.


백춘길이 본 김영배는 그의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던 소녀가 사랑할 만한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한 발짝 물러섰고 낯선 이를 집 안으로 들였다. 술빵에 어울릴 다즐링 티를 골라 우려내며 그는 물을 조금 흘렸다. 서두르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집에 마지막으로 손님을 초대한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로얄 코펜하겐 찻잔에서 꿀빛을 내는 차가 김을 모락모락 냈다. 높게 솟아오르던 김은 소파에 웅크린 김영배의 턱 부근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마주 앉은 두 노인의 사이로 참고 있는 말 대신에 잔뜩 피어올랐다.


백춘길이 먼저 침묵을 깼다.


“해인이의 외할아버지 되시겠네요.”


김영배가 고개를 들고 허리를 조금 폈다. 그의 얼굴에 언뜻 자랑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네. 여기 온 이유도 해인이 때문입니다.”


잠시 망설이다 김영배는 이어서 물었다.


“해인이를 어떻게 압니까? 이 동네에 살지 않는 아이를 어쩌다 만났는지 궁금해서요.”


“대문 보셨죠? 작년 가을 일이에요.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봤는데,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더군요. 달래주다가 상처를…치료해주고 돌려보냈어요.”


백춘길은 이상하게도 상처에 대해 말할 때 매우 불편해 보였다. 김영배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일주일 정도 지났나. 감사 인사를 한다면서 직접 만든 과자를 들고 찾아왔어요.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 오늘처럼 차를 내어줬죠. 그 후로도 가끔 찾아왔어요. 참 사려 깊더군요, 손녀 분은.”


백춘길은 해인을 다 큰 어른 대하듯이 말했고 김영배는 그가 선택한 단어들이 낯설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해인은 낯선 노인의 집을 지난가을부터 들락거린 것이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보는 제 할아버지를 집에 워커홀릭 엄마와 내팽개 쳐놓고 말이다. 김영배는 방금 들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일단 술빵을 내밀었다. 대화의 주제를 돌려야 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제 일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직접 준비했는데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어제 일이라뇨?”


술빵을 받아 든 백춘길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김영배가 사과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김영배의 뺨이 또 붉게 달아올랐다.


“해인이가 버드랑골 백 영감을 찾아가 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본다는 것이, 대문 밖에서 엿본 꼴이 되어서요.”


백춘길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울림이 풍부해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맴돌다가 어깨를 움츠린 김영배에게도 가 닿았다.


“그 일이라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빵은 잘 먹을게요.”


김영배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찻잎은 너무 진하게 우려냈고 물은 너무 뜨거웠다. 그는 데인 입천장을 혀로 더듬다가 백춘길이 설명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해인이는 제게 친구가 없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만들어줘야겠다는 계획을 세운 모양입니다. 그 아이의 머릿속에서 제 친구가 될 대상이, 백 영감님이고요. 친구가 되는 비법을 저한테 하나씩 보내준다고 합니다. 한 달 안에 친구를 만들지 못하면 다시는 저를 보지 않겠다고도 했죠.”


“저런. 그래서 영배 씨는 뭐라고 했나요?”


김영배는 서재에서 그랬듯이 무의식적으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다 서둘러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타인의 집에서 이렇게 편한 행동이 나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애석하게도 저는 뭐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해인이는 자신의 조건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네요. 해인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요.”


백춘길의 눈에서 장난기가 아주 잠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김영배는 잘못 본 것인가 하고 눈을 비비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네? 그게 무슨….”


“해인이가 비법을 메시지로 보낸다면서요. 그대로 해주면 되지요. 그러다 보면 해인이가 필리핀에서 돌아올 때쯤 영배 씨와 제가 친구가 될지 누가 알겠나요.”


해인이 필리핀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백춘길에게 했는지 김영배는 의심스러웠다.


‘저 노인네는 생각보다 해인이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대꾸를 얼버무렸다.


백춘길은 락앤락에서 네모나게 눌린 술빵을 꺼냈다. 그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김영배도 고소하고 톡 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술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백춘길을 지켜봤다. 디저트용 포크를 가져오느라 부엌에 다녀온 낯선 노인과 그는 어느새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아내한테 그랬습니다. 딸내미 키우기도 힘든데 강아지를 들이는 건 말도 안 된다고요. 그런데 마누라의 고집을 어떤 남편이 꺾겠습니까.”


다시 백춘길의 웃음소리가 들려 반가웠다. 그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김영배는 소파에 기대서 습관적으로 다리를 꼬았다. 그가 조금 전 건넨 메모지를 백춘길이 살피는 중이었다.


“집 전화번호입니다. 저는 거의 온종일 집에 있으니까 거기로 전화하는 게 편할 겁니다. 핸드폰으로는 사기 전화가 많이 걸려와서요.”


백춘길은 메모지를 접지 않고 탁자에 올려놨다. 손바닥에도 온통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상처 위치를 보아하니 심하게 넘어진 모양이라고, 김영배는 안타까워했다.


“그 집에서 아내 분과 쭉 사신 건가요?”


백춘길이 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벼운 물음에 묻어났다.


“맞습니다. 백 영감님 아내 분도 한 번 뵙고 싶군요. 집안을 보니 분명 깔끔한 분일 것 같습니다. 백 영감님이 이렇게 뜨겁고 쓰게 우린 홍차를 내온 걸 알면 그분이 뭐라고 할까 겁납니다.”


김영배는 혼자 웃다가 백춘길이 따라 웃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백춘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막 마시려던 차를 그가 도로 내려놨다. 입을 열었을 때에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만 나가주셔야겠어요.”


어색한 미소는 이내 당황한 찌푸림으로 변했다. 김영배는 그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신 온몸으로 주저하고 미안해하고 쩔쩔맸다.


백춘길은 김영배의 모든 몸짓 언어를 무시하고 그를 마당까지 안내했다. 안내가 아니라 내몰다시피 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김영배는 불쾌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백춘길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식당에서 그의 탄 피부를 보며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던 이들. 혼자 사는 그에게 파출부라도 소개해주겠다며 친한 척하던 이들. 그들의 눈은 모두 이기적인 호기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때마다 백춘길은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은 예의를 지킴으로써 그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하나 긋는 것뿐이었다. 너와 나는 다르다. 그의 까만 눈에 담긴 뜻이 전달되면 상대방은 어김없이 모욕적이라고 여기거나 짜증을 내며 물러났다.


김영배를 내보내고 백춘길은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대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가던 김영배가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어깨는 축 늘어뜨리고 구부정하게 선 노인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빈 락앤락 통을 만지작거리는 양손은 백춘길에게 고정된 시선과 달리 끊임없이 움직였다.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서는 부산스러운 손만큼 심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영배의 반쯤 열린 입술에서 어떤 단어가 말이 되어 나오려 했다. 백춘길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대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그 바람에 걸쇠에 긁힌 부분에 페인트가 벗겨져 나왔다. 흠집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집으로 향했다. 이미 문을 닫았고 돌이킬 수 없었다.


힘이 빠져 현관 계단에 잠시 앉아야 했다. 김영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지, 백춘길은 그의 입 모양을 따라 하다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백춘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기지 않은 대문은 바람에 따라 조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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