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번째 메시지

김영배는 버드랑골 백 영감이 마음에 들었다.

by 두밥

집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보다 고됐다. 김영배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언제라도 넘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한 발자국마다 위태로웠다.


불안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건 지난 며칠간 해인이 그에게 남긴 불안과 달랐다. 해인이 남긴 임무를 해낼 수 있을지, 임무에 실패해도 손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대체 해인은 왜 그런 임무를 제게 남겼는지. 그런 걱정 대신 새로운 두려움이 피어났다.


백춘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도 뭣한 작은 노인이 자꾸 떠올랐다. 해인과 묘하게 닮은 까만 눈과 가느다란 목. 집주인이 풍기는 분위기처럼 아늑하고 가지런히 정돈된 집. 너무 오래 우러나와 쓴 홍차를 내오던, 신중한 손길까지.


영배는 홍차를 두고 한 말실수를 떠올리곤 걷는 도중에 멈춰 섰다. 만약 백춘길을 다시 볼 수 없다면 그건 온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대로변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영배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동안 집 방향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깜박거렸다가 붉어지길 반복했다.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김영배는 버드랑골 백 영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작은 노인에게서 좋은 구석을 찾기란 어려웠다. 아직 그만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영배가 싫어하는 구석을 찾기란 훨씬 더 어려웠다. 그는 사람을 볼 때 오만가지 부분을 거슬려했다. 그 부분을 백춘길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희미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존재감이 대화를 나눴던 짧은 순간을 환하게 밝혔다. 처음이었다. 해인과 딸 경희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이렇게 편안했던 것이.


신호등에 다섯 번째로 초록불이 들어왔을 무렵 영배는 걸음을 뗐다.


한동안 해인은 횡단보도의 흰 무늬만 밟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검은색 아스팔트 밑에는 용암이 흐른다고 굳게 믿었다. 근거 없는 믿음은 해인이 길을 건널 때마다 폴짝폴짝 뛰게 만들었고 아이는 정말이지 즐거워 보였다.


순진무구한 믿음을 가지기에 영배는 꽤나 늙어버렸다. 그럼에도 백춘길에게 건넨 노란 메모지에 대한 생각이 그날 하루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백춘길은 그의 집 전화번호를 알았다. 어쩌면 두번째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아주 오랜만에 김영배는 흘러가는 시간을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 * *


“나는 못한다. 아니, 안 해.”


전화기 반대편으로 정적이 흘렀다. 영배는 뱉은 말을 수습하는 대신 같이 침묵을 지켰다.


해인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났다.


“어렵지 않잖아. 버드랑골 백 영감은 착하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줄걸.”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단다, 해인아.


영배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백춘길의 집에서 쫓겨난 다음날이었다. 정오가 되자 이번에도 핸드폰이 울렸다.


<친구가 되는 비법>
2번. 함께 밖을 다니기 (대화는 필수)


정신이 아득해진 영배가 건 전화를 해인은 바로 받았다.


“할아버지! 지난번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백 영감 하고는 만나봤어?”


이 할아버지의 안부보다 백 영감하고 만났는지가 더 궁금하구나. 영배는 문득 서러워졌다. 해인에게 하소연을 줄줄 늘어놓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더 이상 손녀의 최대 관심사가 자신이 아니어서 서운했다.


할아버지의 투정 아닌 투정을 들은 해인은 생각에 잠긴 채 비음을 길게 냈다.


“음, 내 생각에는 되게 간단한데. 백 영감한테 찾아가서 산책하자고 해. 나랑도 산책 자주 다녀서 어디 갈지는 백 영감이 알 거야.”


‘해인이하고 산책을 다녔다고? 자주?’


영배는 해인하고 산책하는 백춘길을 상상해 보았다.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폴짝대는 열한 살 아이와 느리고 확신에 찬 걸음걸이를 가진 노인. 둘이 함께 걷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어울렸다.


영배 본인은 해인하고 산책을 나간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당연하게도 비워둔 공백을 백춘길이 뻔뻔하게 차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한편 할아버지의 침묵을 해인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러곤 대화 주제를 바꿨다.


“나 지금 공항인데. 할아버지는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내가 면세점에서 사줄게!”


그 후 약 10분은 해인이 새로 알게 된 ‘면세점’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졌다. 설명은 엄밀히 말해 정확하진 않았지만 꽤 자세했고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영배는 그동안 생각할 시간을 좀 벌었다.


“맞다. 아까 숲에서 사슴 봤다? 공항버스 타고 가는데 나무 사이에 사슴이 있었어. 나 사슴 엄청 좋아하잖아. 너무너무 행복했어.”


해인의 목소리가 환희로 가득했다. 영배가 그동안 준비한 말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는 실패할 것 같다고, 그래도 할아버지를 봐주면 안 되겠냐는 부탁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사슴,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여. 백춘길을 보고 떠올렸던 시 한 구절이 혀 끝에서 맴돌았다.


영배는 신을 믿지 않았다. 전지전능한 존재,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 운명. 전부 사기꾼의 협잡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우주가 그를 어디론가 내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있는 힘껏 돌아서려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해인이 본 사슴이, 어떠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영배는 눈을 감고 사슴을 그려봤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km로 달리는 버스 안. 주변 풍경은 물감처럼 흐릿하게 번지고 몸에 가해지는 일정한 힘에 잠이 쏟아지고. 그러던 중 잎을 다 떨군 나무들 사이에서, 무언가 그를 지켜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의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마침내 눈이 마주친다. 사슴의 까만 눈. 긴 목을 꼿꼿이 세우고 흔들림 없이 그를 지켜보는…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에 잘 울리지 않던 집 전화기였다. 이 시간에 과연 누가 전화했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영배는 그가 백춘길에게 건넨 노란 메모지의 모든 부분을 기억했다. 볼펜으로 글씨가 써지던 촉감과 손 아래에서 만져지는 종이의 질감과 샛노랗고 쨍한 색감까지. 마찬가지로 그는 강한 확신을 갖고 알았다.


정겹게 울리는 전화를 받는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해인에게 인사말을 남기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집 전화기가 있는 거실까지 종종 걸어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여보세요?”


“영배 씨, 백춘길이에요. 집 전화를 남겨주셨길래 연락드려요.”


“예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머리가 하얘졌다. 영배는 겁에 질리고 궁지에 몰린 생쥐마냥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목을 가다듬으려 헛기침을 하느라 이어지는 말을 놓치기까지 했다.


“제가 뒷말을 놓쳤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가볍게 웃었다. 어제 일이 무색하게 백춘길은 밝게 재잘거렸다.


“날이 정말 좋다고요, 영배 씨. 2월 치고 하늘이 맑고 예뻐요.”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끝에 백춘길이 말을 마저 꺼냈다.


“공원에서 볼래요? 지난번에 주신 술빵을 맛있게 먹었어요. 보답하고 싶어서요.”


공원에서 보는 것과 술빵에 대한 보답을 연결 짓기 힘들었지만, 영배는 어느새 동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식사하신 후에 어떻습니까? 공원이면 주안산 자락에 있는 곳 맞죠?”


“네 맞아요. 3시에 분수대 광장에서 봐요.”


백춘길이 전화기를 아주 살포시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달칵 소리는 영배의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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