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떨어져 선 영배를 발견한 춘길의 얼굴이 환해졌다.
백 영감 말대로였다. 2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치고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새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공기는 겨울날의 바늘 같이 찌르던 냉기를 조금 잃었다. 햇살은 이전보다 힘을 내 온기를 전했다.
주안근린공원은 적당히 활기가 돌았다. 근처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나왔다 돌아가는지 손을 잡은 꼬마들이 아장아장 걸어갔다. 민들레 홀씨 같은 보송한 머리들이 공원 입구에 주차된 노란 버스로 하나둘 사라졌다.
공원 한켠 풋살장은 학교를 일찍 마친 중학생들로 소란스러웠다. 길가에 늘어선 운동기구는 김영배보다 약간 젊은 이들이 차지했고 잔디구장은 그보다 훨씬 기운 넘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영배는 백춘길이 분수대 광장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백 영감이 먼저 도착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근거는 딱히 없었다. 다만 광장 가장자리를 둘러 걷고 있을지, 벤치에 앉아있을지, 등나무 정자 아래 기대 서 있을지 공상할 뿐이었다.
그래서 멀리서 훑어본 분수대 광장 풍경 어디에도 작은 노인이 보이지 않자 영배는 실망했다. 아직 약속한 시간까지 5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래도 백춘길 같은 노인은 아주 여유를 두고 나올 성격 같았는데.
영배는 누군가에게 관찰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와 함께 있지 않을 때의 백춘길이 보이는 모습을 알고 싶었다. 풍경 속에 온전히 스며들어 있는 작은 노인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대문 너머에서 바라봤던 순간처럼.
그때 어린아이의 숨차고 새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버드랑골 백 영감이었다.
백춘길의 손에서 알록달록한 방패연이 점점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람이 일순간 세차게 불었다. 영배가 옷자락을 여며야 했을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연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멈춰 선 백 영감 주위로 모여든 아이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온 동네에서 모여든 꼬맹이들에게 실을 감고 때에 맞춰 푸는 법을 알려주던 백춘길이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영배와의 약속이 뒤늦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한 발짝 떨어져 선 영배를 발견한 춘길의 얼굴이 환해졌다.
“영배 씨! 와서 같이 연 날려요!“
주위에 있던 아이들의 눈길도 영배에게 향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멀찍이 물러났는데도 아이들이 종알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친구예요?”
“할아버지도 친구 있어요?”
“저 할아버지는 뺨이 빨개요. 산타할아버지예요?”
“바보야 그건 루돌프야.”
“할아버지한테 또 연 날려달라고 해도 돼요?”
춘길은 모든 질문에 성의껏 답했다. 친구란다. 물론 할아버지한테도 친구는 있지. 산타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선물을 달라고 하면 줄 지도 모르겠어. 루돌프는 코가 빨갛지? 그럼, 당연히 그래도 되지.
꼬맹이들은 다음 주에 또 오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후에야 백춘길을 놓아줬다.
이 시점에서 이미 지쳐버린 김영배는 광장 구석에 벤치로 피신해 있었다. 해인이 또래 거나 조금 더 어린아이들이 뿜어내는 활기에 치여 기운이 쪽 빠졌다.
“아이들을 안 좋아하세요?”
영배 옆자리에 앉으며 춘길이 물었다.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챙길 수 있는 아이는 해인이 하나뿐이더군요.”
“그러면 충분하죠. 살면서 보살핌을 받는 것도, 행하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자식이 없어서요.“
뜻밖의 고백에 영배는 무슨 말로 답할지 망설였다. 춘길은 그가 고민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려는 듯 한마디 얹었다.
“해인이가 영배 씨를 참 좋아해요.”
영배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가 춘길의 까만 눈을 발견하고 서둘러 고개를 수그렸다. 눈동자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무서웠다.
“제게 와서도 할아버지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요. 절로 어떤 분인지 궁금해질 정도였어요.“
‘그래서 해인이에게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를 제안했나?’
해인을 마지막으로 봤던 날부터 시작된 영배의 의심이 한층 몸집을 불렸다. 다른 사람의 제안이 아니라면 해인이 뜬금없는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할아버지를 안 만나겠단 선언을 할 이유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영배는 알았다.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는 지극히 해인다운 발상이었다. 백춘길이 제안했다 하더라도 해인의 적극적인 의지 없이는 실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정하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손녀가 그를 걱정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배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만큼 타인의 오지랖도 싫어했다. 설령 타인이 손녀여도 그의 뿌리 깊은 고집은 여전했다.
그는 오지랖이 상대를 은연중에 낮잡아보는 태도의 결과라고 여겼다. 내가 상대를 도울 수 있을 거란 오만한 믿음. 값싼 동정을 베풀고 만족하며 떠나는 일회용 선행. 그게 오지랖의 본질이었다.
“오지랖인지도 몰라요. 그래도 해인이에게 영배 씨 이야기를 듣는 게 참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 춘길이 영배를 보는 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가득했다. 동경. 영배에게 생소한 빛이 춘길의 눈동자에 온통 반짝였다.
영배는 몸을 움츠렸다.
“해인이가 제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고 다닐 줄 몰랐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저를 만나러 와서도 밖으로 쏘다니길래 걱정했습니다.”
춘길이 고개를 돌리고 작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거두어지자 영배는 비로소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건 제 탓이에요. 영배 씨가 불편하다면 해인이에게 더는 오지 말라고 할게요.“
“아닙니다.”
영배는 다급히 춘길의 말을 가로막고 그 자신도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분명 처음에는 걱정이, 다음에는 질투였다. 지금은 해인이 춘길을 보지 못하게 막는 것이 더 꺼려졌다.
“해인이도 백 영감을 좋아합니다. 못 만나게 된다면 아쉬워할 거예요.“
“궁금하네요. 영배 씨에게 해인이가 저에 대한 말도 했나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제가 자주 깜박깜박합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죄책감을 느끼며 영배가 에둘러 대답했다. 춘길에게 가서 할아버지 얘기만 했던 해인은 영배에게는 비밀 친구에 대해 입을 꾹 다물었었다.
영배의 망설임이 충분히 고맙다는 듯 춘길이 또 그와 눈을 맞춰왔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영배 씨만 괜찮다면 나중에 셋이서 만나도 되지 않을까요? 사실 해인이는 저희 둘이 친구가 되길 바랐으니까요.“
“그래도 괜찮겠네요.”
현재로선 잘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영배는 그럼에도 그가 춘길의 말을 듣자마자 그날을 기대하게 됐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전 대학에서 국사를 가르쳐요. 강의실에 있으면 학생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 짧은 순간에도 개성이 보이곤 해요. 그런데 재밌는 건 조용히 다니던 친구도 학기가 지나 무리 지어 다니게 되면 활기차진다는 점이에요.“
춘길이 조곤조곤 말했다.
“불특정다수에게 혼자 있을 때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도 분위기가 달라지잖아요. 욕심이지만 영배 씨와 있는 해인이가 어떨지 궁금해요. 해인이와 함께 있는 영배 씨의 모습도요.”
영배는 춘길을 엿보고 싶던 충동이 떠올라 안 그래도 붉은 뺨이 조금 더 빨개졌다.
“셋이서 꼭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두 노인은 오후가 찾아온 공원 풍경에 취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고 광장 구석 음수대에는 새들이 이따금 찾아왔다. 까치, 참새, 직박구리, 박새까지 가는 다리로 걸터앉아 수도꼭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을 마셨다.
나른한 햇살이 벤치를 데웠다. 바람은 귀신같이 잦아들어 적당히 옷만 껴입는다면 앉아있어도 춥지 않았다.
앙상한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누가 먼저 정적을 깼는지는 몰라도 영배와 춘길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영배의 술빵 레시피, 춘길의 대학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 요즘 애들에 대한 논의. 그러다 춘길이 영배가 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예전에 동요 작사작곡 일을 했습니다. 저는 안 유명했지만 제 노래들은 많이 사랑받았죠.”
“제가 들어본 것도 있으려나요.”
“산도깨비, 통통배, 구름 타고 훨훨. 이런 노래들입니다.”
춘길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영배는 혹시 알까 싶어 그가 작곡한 몇 안 되는 가요들도 알려줬지만 춘길이 아는 곡은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불러보고 싶네요. 예전에 노래 부르길 즐겨했어요.”
아쉽고 왠지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춘길이 덧붙였다.
영배는 그가 처음 춘길을 봤을 때의 모습을 기억했다. 콧노래만으로도 전해진 음성은 듣기 편안했다. 그래서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가면 영배는 서재 구석을 뒤져 오래된 악보집을 찾아내고 싶었다. 표지를 덮은 먼지를 두툼한 손으로 쓸어내고 오래된 가락을 발굴해 내 그의 초라한 노래 실력으로 따라 부를 것이다. 단순한 선율이 춘길의 목소리로 나왔을 때를 상상하겠지.
그렇게 영배는 춘길과의 다음 만남을 기다리고, 기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