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꼭 (모든)일에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1
텃밭농사를 지으면서 좋아진 게 있다. 그건 '비'다. 비의 축축한 속성을 싫어했다. 축축해서 젖는 것 자체가 싫었다. 젖으면 옷을 갈아입고 부수적으로 따르는 일이 하기 귀찮았다. 그렇게 농사를 짓다가 알았다. 땅은 비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퉁칠 수 없다. 왜냐하면 비가 오기 전후에 작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작은 텃밭농사이지만 직접 봤기 때문이다. 비가 고마운 순간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지난 10월부터 명상을 시작했다. 새벽기도와 매일기도에 열심을 낼 순간처럼 나에게는 명상이 그렇게 인식됐다. 특히 비가 올 때 명상하는 게 좋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가 내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장마기간에 비가 많이 와서 불편했다. 하지만 우산 속에 몸을 쏙 넣곤 퍼붓는 빗소리를 듣다 보면 이상하게 고요한 마음이 찾아왔다. 3초의 고요함이라도 역할이 많은 나에겐 안락했다.
오늘도 태풍9호 종다리 때문에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약간 창문을 열면 빗소리와 공명하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해졌다. 몇 년 만에 요가매트를 깔고 그 위에 방석을 놓고 고요한 시간을 가졌다.
혼자서 명상을 시작하고 회고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다이어리에 명상하고 느낀 점이나 몸의 감각을 길든 짧든 기록하고 있다. 아주 가끔 생각한다. 나를 위한 시간 30분 내기도 이렇게 힘들 때 그럴 때는 멈춰야 한다는 신호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태풍9호 종다리 때문에 비가 내리는 오늘 아침은 어땠냐고?
가만히 빗소리를 귀 기울이는 순간이 좋았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회사에 대표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는 여자 팀장님. 그가 말하면 잘 들리지 않는다. 내 안에서 접수가 잘 되지 않는다. 그 점을 생각했다. 이유가 뭘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첫 만남부터 삐걱된 사이라서 한번 틀어진 관계에서 묻어 나오는 감정일까.
자신이 맡은 역할을 감당하는데 이야기가 길었다. 그거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는지 아세요?라는 뉘앙스가 대부분의 말에 깔려 있다고 느꼈다. 내 느낌이지만 나는 그게 싫다. 내가 판을 깔면 그가 와서 춤을 췄다. 내가 깐 판에서 스스로 놀고 싶었다. 내 안에 그런 욕구가 크다.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싫다. 주인공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말이 내게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다.
왜 내가 꼭 (모든)일에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나는 뒤치다꺼리하면 안 되는 인간인가?
내가 뭐라고
진짜 하라고 떠밀면 잘할까? 그것도 아니면서 주목받고 싶고 주체적으로, 주도적으로 판을 흔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다. 대부분 부서에서 그의 입김이 얼마나 센지 그걸 보는 게 불편해다. 자기가 없으면 회사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는 듯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없다고 회사가 굴러가지 않을 일은 어느 곳에도 없다.
어쩌면 내 마음 안에 주체적으로 내 일을 하고 싶은 강력한 욕망이 건드려지는지 모르겠다. 타인이 만든 비전이라는 판에 발을 담그는 게 아니라 내가 주고 싶은 가치를 만들어가고 싶다. 내 일을 찾을 거다. 비가 자연의 섭리대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살아내고 싶다.
하지만 여기에도 맹점은 존재한다. 타인의 필요와 결핍을 읽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적인 면에서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떤 결핍을 읽어내야 할까. 이건 또 내일 스스로에게 묻는 기나긴 시간을 보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