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아서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고 계속 건강한 이야기
#1. 밑밥이랄까
선행을 자기 입으로 퍼뜨리는 일을 터부시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선행을 하더라도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총총 행방을 감추는 이름 없는 천사 이야기를 선호하지요. 예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으리란 인터뷰까지 더하면 선행기사로서 기본 도리를 갖춘 셈입니다. 이런 서사가 주는 뭉클함은 아마도 금전적인 대가나 과시욕 등 사심이 없다는 점에서 기인할 텝니다. 즉, 인간은 본디 선하다거나, 이타적인 경향성은 생득적이라는 믿음의 증거로 삼기에 참 좋습니다. 네, 얼굴 없는 천사 이야기는 분명히 세상에 이로운 거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덕을 어기고 얼굴을 드러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2007년에 배우 최강희 씨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골수기증을 했다는 기사를 통해서였고 코미디언 김숙 씨는 병실에서 쾌활하게 지내는 그의 모습을 찍어서 블로그에 대신 올려주었죠. 이 사건은 저의 잠재의식에 도사리다가 십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슬며시 발현했습니다. 시간이 좀 떠서 헌혈의 집에 간 제가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자 등록을 권유받았을 때, 불현듯 그 웃는 얼굴이 나타나서 고개를 끄덕이라고 부추겼습니다. 우리가 선호하던 미담의 틀에서 벗어나 드러낸 얼굴 덕분에 벌어진 일입니다.
#2. 행운이랄까
비혈연 관계에서 조직적합항원(HLA)이 기증할 수 있을 정도로 일치할 확률은 2만 분의 1(0.005%) 수준으로 매우 희박합니다. 게다가 건강과 시간 등 다른 여건도 따라주어야만 실제로 기증까지 이루어지기에, 어림잡아 로또 3등에 당첨될 수준이라고 상상해도 좋겠습니다. 설마 복권에 당첨되겠냐며 호기롭게 검사용 채혈에 응하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조혈모세포 기증 코디네이터로부터 당첨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직장에서 입원기간 공가 처리에도 협조해 주었고, 건강상태도 좋았습니다.
몇 가지 행운이 더 이어졌습니다. 주로 골수에 밀집한 조혈모세포를 성분헌혈하듯이 말초혈관으로 채취하기 위해서는 그라신이라는 촉진제(주사)를 여러 차례 맞아야 합니다. 기증 후에 촉진제를 맞지 않으면 조혈모세포는 마치 연어처럼 고향인 골수로 돌아가지요. 일부는 그라신을 맞은 뒤에 몸살증상이나 통증이 심해서 힘들어한다는데(코로나 백신과 유사), 저는 특별한 부작용이 없었습니다. 코시국이었지만 다행히 감염되지도 않았습니다. 또, 팔뚝 핏줄(상완정맥)이 적당히 곧고 뚜렷하지 않으면 목(중심혈맥)으로 채취해야 하는데, 다행히 팔뚝으로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행운은 수혜자가 잘 견뎌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공여자에게도 여러 불편이 있다지만, 목숨을 걸고 감행하는 수혜자에 비하면 너무 사소합니다. *[참고] <2021 조혈모세포 기증 인식개선 공모전>에서 동영상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엘리 님의 <조혈모세포이식, 102일간의 입원 이야기> https://youtu.be/3uWqu5-B-Q0?feature=shared
#3. 효능이랄까
끝으로, 조혈모세포 기증이 가져오는 효능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공여자와 수혜자는 비로소 혈연관계를 맺었지만 평생 서로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증을 언제 어디서 했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알리지 않는 것이죠. 오직 코디네이터를 통해서 수혜자의 안부를 접할 수 있습니다. 기증을 통해서 회복하였다지만, 재발할 가능성이 있기에 한 배를 탄 저는 55세까지 언제든 기증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는 건강관리를 위한 대단한 동기부여입니다. 만약에 조혈모세포 기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건강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다른 효능은 상투적이지만 보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인명을 구조하는 일이나 의료계에 종사하지 않고서야 타인의 목숨을 구할 기회가 살면서 몇 번이나 찾아올까요? 기회가 온다 한들 망설이고 헤매다가 놓칠 가능성이 훨씬 많지 않을까요? 조혈모세포 기증은 관련 협회들이 체계적인 절차를 구축해서 전문적이고 세심하게 조력합니다.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기회를 잡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요. 덕분에 공여자는 아픈 사람을 살렸다는 뿌듯한 업적을 쉬이 취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첫째로 지난 선행을 자기 입으로 퍼뜨리며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둘째로 이 글을 통해서 누군가 마음이 동해서 동참하길 바라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2만 분의 1이 결코 낮은 확률이 아니게 되겠지요. 셋째로 기증을 기다리는 환자를 위해서 공여자가 되는 일 말고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관련 협회의 후원자가 되는 겁니다. 충분한 인력이 모여서 기증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도울 수 있으니까요. 후원이 부담스럽다면 자원봉사를 통해서 기증 문화를 확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공여자는 행운이 따라야 될 수 있지만, 후원과 봉사에는 문턱이 없으니까요. 즉, 확률은 1(100%)입니다.
*[참고]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 https://kmdp.or.kr/4_1_1.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