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께 다시 연락드리기까지 꼬박 18년이 걸린 이야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지금까지 매년 5월이 올 때마다 다음 해 스승의 날에는 꼭 선생님을 뵈어야지, 다짐했습니다. 왜 그해가 아니라 다음 해였을까요? 그 선생님이 정말 좋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생님께 고작 이런 모습을 보여서 실망하시거나 되려 마음의 짐을 지우진 않을까 싶어서 용기가 나지 않았지요. 결혼식 때는 꼭 모셔야지, 했는데 코로나라는 핑계가 생겨서 또 미루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마음으로 주저하며 무려 18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제가 나고 자란 지방 공단지역은 참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한계를 만회할 수준으로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고요. 차라리 농어촌이라면 풍요로운 자연이라도 실컷 접했을 텐데, 견문을 넓힐 기회가 없으니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가 주된 놀거리였습니다. 그렇게 별다른 기대 없이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특별한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첫 제자들이었고 선생님은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들 몇 가지만 꼽아서 자랑해 보렵니다.
첫 번째 선물은 다음 카페입니다. 급우들이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직접 개설하신 건데, 그때부터 온라인 글쓰기를 좋아하던 저는 덕분에 친구들과 부쩍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책과 음악입니다. 선생님은 우리 반 모든 학생들에게 생일선물을 주셨는데, 제가 받은 선물 하나는 상실의 시대였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작가의 소설을 빌려주시거나 절판된 책을 그냥 주시곤 하였는데, 독서와 글쓰기가 저의 취미이자 무기가 된 배경에는 그런 따뜻한 관심과 지지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직접 구운 팝 CD였습니다. 펄 잼,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전설적인 밴드 음악들이었죠. 지금은 골동품이 된 CD-RW로 mp3 파일을 선별해서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마지막은 DSLR 카메라입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누나가 콘서트를 보여주었는데, 달뜬 저에게 고가의 DSLR을 무한정 빌려주신 겁니다. 기본적인 사용법도 알려주셨겠지요. 지금도 직장에서 가끔 사진 촬영을 지원할 때가 있는데, 카메라를 작동할 때마다 전해지는 진동을 따라서 선생님 생각이 찰칵 찰칵 났습니다. 그 시기에 어떤 수업보다 값지고 필요한 경험들이었습니다. 체벌을 하지 않고 청소를 함께 하시는 등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면서도 어른으로서 성숙한 본보기가 되어주신 선생님은 "학생이 미워 죽겠다 할 때는 언제인가?"이라는 교지 앙케트에서 유일하게 없다고 응답하시며, "학생이 미워 죽겠으면 선생을 관둬야지."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하셨죠.
여전히 미성숙한 저는 누구나 알아주는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그 이상의 부와 명예를 달성하여야만 선생님께 보람과 도움이 되리라 믿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타인에 대한 기대도 균형 있고 조화로운 방향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DSLR 일화에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던 누나가 와중에 저와 가족에게 베풀었던 마음은 이 글을 작성하면서 처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또, 선생님께 빌린 DSLR을 몇 개월이나 소중히 끼고 다니던 모습을 본 어머니가 홈쇼핑으로 구입해 준 디지털카메라가 생각났습니다. 척박하기만 한 환경은 아니었구나,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를 지지하는 자원이 곳곳에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이 샘솟습니다. 비로소 용기가 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곧장 답장이 왔습니다. 행복하고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더 생긴 것 같습니다.
"한때 내가 아끼던 ○○였던 이름의 아이구나. 이젠 아이가 아니겠네. ^^ 반갑다. ○○아. 나이 생각하면 반말하기 뭐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