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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애희 Jun 03. 2024

후지시로 세이지_달밤의 전봇대, 2013

후이시로 세이지와 미야자와 겐지처럼

한 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지난 2월 눈이 오던 날, 둘째 아이와 함께 본 <오사카 파노라마> 전시에서 후지시로 세이지를 처음 만났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1924년 일본에서 태어난 작가로 올해 100세를 맞이했다. 한 세기를 산 작가를 마주하니 '대단하다!'라는 감탄이 먼저 나왔다. 1월에 193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미셸 들라크루아 작가를 마주하며 예술을 향한 그의 생명력에 놀랐었는데,  후지시로 세이지 작품 또한 내 삶에 대해 생각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나에게는 94세의 외할머니가 계신다. 지금은 알츠하이머(치매) 병으로 친정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기억의 조각과 끈을 잡고 삶을 살아가신다. 한 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 그리고 예술과 함께 살아온 작가의 삶이 부럽기도 했다. 


"100살이라면 긴 것 같지만 10년의 10배이니 그리 길지도 않아요." _KBS 월드뉴스


'100년, 10년의 10배라니!'어쩜 그는 삶을 젊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것 같다. 앞으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 한 마디는 그의 작품 속으로 더 깊숙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만들었다.


후이시로 세이지와 미야자와 겐지


후이시로 세이지는 '그림자 그림'의 거장으로 면도날로 종이를 일일이 오려 트레싱지를 덧댄 후 빛을 투과해 작품을 완성하는 '카게에' 작가다. 그의 빛과 그림자는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알록달록 알사탕 같은 색들이 공존했기에 어린 시절 보았던 인형극,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그램 등이 떠올리며 추억 여행 하기에 좋다. 동화 같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건 일본의 국민작가 '미야자와 겐지'로, 후이시로 세이지의 글을 통해 겐지의 동화가 '카게에' 작업과의 연결 고리임을 알 수 있다.


"나는 겐지 동화와 만나 처음으로 카게에 작가로서 눈을 떴다고 해도 좋다. 겐지의 동화는 그때까지 읽어본 것과 좀 달랐다. 단순한 동화라기보다 기도(祈禱)의 동화라고 할까?  그 바탕에 무언가 깊은 기원과 기도가 담겨 있다. 겐지 작품을 카게에로 만들 때는 특별한 감정이 든다. 한 번 읽어본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어보는 중에 마음속에 강한 공감이 끓어오른다. 겐지는 ‘세계가 모두 행복해지지 않는 동안은 개인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후지시로 세이지, 미야자와 겐지 실루엣_출처: https://blog.naver.com/donghlee1001/223387773671

후이시로 세이지는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개 했고, 이번 전시에서 <달밤의 전봇대>, <눈 건너기>, <첼로 켜는 고슈>를 만날 수 있었다. 미야자와 겐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등 일본의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작가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던 우리나라 동화작가 권정생 또한 어린 시절 청소부인 아버지가 주워 온 동화책 중미야자와 겐지의 <달밤의 전봇대>를 읽었다고 한다. 미야자와 겐지가 생전에 출판된 단편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의 서문에 “내 이야기들은 모두 숲과 들판과 철도선로에서 무지개나 달빛에 받은 것입니다. 정말로 떡갈나무 숲의 푸른 저녁을 홀로 지나가거나 십일월의 산에서 바람에 떨며 서 있으면 정말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로, 분명히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 이야기를 나는 그대로 쓴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처럼 상상력 가득한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들은 후이시로 세이지 작품 속으로 그대로 투영된 것만 같다.


후지시로 세이지, 미야자와 겐지 동화 <달밤의 전봇대>2013, 800X600, 트레싱지, 종이필터지_출처:료의 사진첩

달밤의 전봇대     


역사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수원 화성행궁 근처 선경도서관을 다녀오는 길에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곳에 위치한 선경도서관에서 내려다보는 골목길은 파아란 하늘, 눈부신 햇살, 살랑이는 바람,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함께 그 어떤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되어 나와 마주했다. 전봇대와 전봇대를 이어주는 전선들, 전봇대와 집, 가게로 이어주는 전선들을 보니 어릴 적 동네가 떠올랐다. 어릴 적 전봇대는 숨바꼭질할 때 술레가 눈을 가리고 숫자를 세던 곳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광고지를 붙여서 상점이나 물건, 행사 등을 광고하는 광고판이 되기도 했다.

최근 10년 이상 신도시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전봇대, 전선도 아주 신선한 소재가 되었다. 전봇대를 마주하니, 미야자와 겐지 동화 <달밤의 전봇대, 2013> 작품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전봇대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둥그렇고 밝은 보름달과 샛별이 땅을 비춰주는 어느 날, 전봇대 아저씨들이 아주 멀리서부터 행진을 하고 있다. 기차 건널목에서는 한 아이와 길목을 지키는 아저씨가 실랑이 중이다. 다급한 소년과 눈에서 번쩍번쩍 레이저를 쏘는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들의 모습에 아무 신경 쓰지 않는 듯 지나가는 전봇대 아저씨들에게로 시선을 옮겨보았다. 칙칙폭폭 기차처럼 행렬을 이어가는 전봇대, 그들은 피뢰침 모자를 쓰고 각자만의 표정을 가지고 걷고 있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경직되기도 했다. 

후지시로 세이지, 미야자와 겐지 동화 <달밤의 전봇대>2013_출처: 료의 사진첩
후지시로 세이지, 미야자와 겐지 동화 <달밤의 전봇대>2013_출처:료의 사진첩


'전봇대 아저씨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전봇대 아저씨들은, 목적지에 잘 도착했을까?' 

'내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문득 작년 잠들기 전에  KH와 도란도란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보, 여보는 미래를 보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난 바로 오늘, 일주일, 한 달을 보며 사는 거 같아요." 


그렇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하루 잘, 무사히 보내는 게 최선인 것처럼 살았다. 아침을 먹고 학교를 보내면 '간식은 뭐 하지?' 생각하고, 간식을 먹고 나면 '저녁은 뭐 할까?' 생각하며, 잠들기 전 에는 '내일 아침 뭐 하지?' 생각하며 냉장고 속을 탐험했다. 아이들을 잘 먹이는 것이 엄마인 나에게는 참 중요했다. 이건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KH처럼 집안의 경제 상황부터 가족여행 계획, 노후까지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계획하는 일까지는 못하겠다. "나는 아이들이랑 우리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잘 지낼지 고민하며 즐겁게 살 테니, 여보는 뒷일을 부탁해요." 하고 마무리되었던 우리들의 대화. 누구나 삶에 대해 다른 목표를 설정하며 살아간다. 목표를 향하는 과정에 분명 어두운 시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어슴푸레한 달빛과 별빛을 찾아 희망이라는 친구와 함께 동행하고 싶다. 


후이시로 세이지가 미야자와 겐지에게 영감을 받은 것처럼 

전봇대의 전선들이 서로서로 연결된 것처럼

나 또한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서로 영감을 받으며 

함께 나아가고 싶다.


그대, 나와 함께 미래를 꿈꿔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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