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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초이 Sep 18. 2024

저는 곧 마흔입니다.

이제야 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흔


이 나이면 나도 철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18살 고등학생 교실에 앉아 잡생각만 하던 그때와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세상의 반응에 익숙해져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 굳이 찾는다면 이것이 달라진 것이겠다. 이것을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간다고 표현하는 것인 것 같다.


공유오피스 책장에 "위대한 멈춤"이라는 책이 지나가던 내 눈에 들어왔다. 양장본이며 두꺼운 책이었다. 점심으로 싸 온 계란과 빵을 먹으며 한 장 두 장 넘겨보았다. 인생의 전환기라는 것, 자신의 인생에 의문을 품고 삶의 방향을 고민한다는 것 내 이야기 같았다.

이 책을 읽은 후로 삶에 대해서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쓰기 싫던 브런치에도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맞는지 아니, 옳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으며 과거의 일들을 짚어가며 내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다시 재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몇 가지 사례가 나온다. 인생의 전환기에서 누군가는 몇 년간 하루에 10시간씩 몇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글로서 적어내기도 하였으며, 누군가는 스승을 만나 배움으로써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한다.


내가 현시점을 인생의 전환기라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재 나이가 39세 나는 것,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 생각지도 않는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변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겠다. 위 책에서 작가는 10년 주기로 인생이 변한다고 이야기하였으며, 나 또한 저 10년 단위로 변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20대는 30대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며, 30대는 40대를 보내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라 한다.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을 옮겨 놓겠다.


헬라어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는 두 개다. 하나는 크로노스인데 흐르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대상으로서의 시간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보내게 되는 시간 같은 것이 이 크로노스이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인데, 의미 있는 시간 가치 있는 시간, 보람 있는 시간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이 땅에서 "잘 산다"는 것은 부자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꾸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없는 시간은 그저 세월의 주름살에 불과하다.


다음의 40대는 얼마나 내가 30대에 사용한 시간을 귀중하게 썼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라는 사람


과거 첫 회사의 대표님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난다.


"야,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평생을 맞추고 살았더니"


사실 나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싫은 것은 많다.


타인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여, 내 본모습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이야기하는 행위를 정말 싫어한다.


난 구태여 어렵게 이야기하며, 그럴 듯이 포장하여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렇기에 말을 쉽게 하려고 하며,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것을 보고 내가 특이하고, 학위는 돈으로 딴것이며,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멋대로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파트로 학위 한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나에게 "니도 내처럼 후루꾸네?" 황당했는데, 말한 사람 기분이 상할까 봐 파트나 플타임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느냐며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넘어갔다. 그냥 여기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난 마음의 앙금이 남는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고, 확대해석과 인지왜곡에 시달린다.


예전엔 이런 생각들로 피곤하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곤 했었고, 그 사람에게 직접 따져 묻기도 하였다. 왜 그랬느냐며 내가 뭘 잘못한 것이냐고 물었었다. 상대는 기억도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면 아내는 되묻는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던, 너만 아니면 된 거 아니야?" 응, 아니다 나는 그랬었다.


이제 나도 바꿔보려고 한다. 저런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 빠져서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다.


얼마 전에 카카오톡으로 선배가 연락이 왔다.

()는 내 인지왜곡인지 그 사람의 저의인지 모르는 내 생각이다.


"잘 지내?" / 네 잘 지냅니다.

(너 사업은 잘 돼 가냐? 망했어?)


"매출은 나오고?" / 네 나와요

(잘 팔리지도 않지?)


"그래? 그럼 네가 술 사라

(어쭈? 이 새끼 봐라?)


마지막 카톡을 보고 차단했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저런 것을 묻는 것이 마치 내가 안되길 바라는 것 같다. 아니 안되어야만 한다고 내가 어디를 가려고 하면 기를 쓰고 잡아 내려 끌어서 바닥에 꽂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사업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저 사람은 저런 저의를 가지고 물었던 것일까? 어쨌든 진실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저런 쓸모없는 소모적인 감정낭비를 줄여야 더 카이로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것과 나라는 사람은 살아오며 저런 것에 감정이 둘러 쌓여 스트레스를 받아오고 살았던 것 같다.


지난주, 그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었고 무시했다. 다음날 전화가 오자 차단해 버렸다. 과거라면 받아서 싸우고 하루종일 아니 이틀이고 사흘이고 기분 나빠했겠지만,


이제는 그만둘 수가 있다. 그렇게 하나씩 알면서 고쳐나갈 거다. 마흔에야 이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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