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남자편 (5)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아니면 단순한 뇌의 착각에 불과할까?

by 정신과 의사 Dr MCT


1인당 15만 원짜리 오마카세의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초밥과 은은한 조명, 그리고 적당히 오른 취기가 민수의 뇌를 무장 해제시켰거든요. 긴장하며 상대를 탐색하던 ‘레이더’는 꺼지고, 상대를 더 알게 되고 싶어 하는 ‘접속 모드’가 켜진 것입니다. 그때, 대화 도중 민수의 뇌세포를 번쩍 깨우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 저도 그 영화 진짜 좋아하는데!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를 인생 영화로 꼽는 남자분 처음 봐요.”


첫 번째 우연이었습니다. 민수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진짜요? 대박. 저 그 영화 대사도 외우는데.” (사실 민수는 보다가 살짝 졸았지만, 지금 뇌는 기억을 서윤에게 맞춰 유리하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실 고수를 못 먹어서 쌀국수 먹을 때 다 빼고 먹거든요.”

“와, 소름. 저도 고수 냄새만 맡아도 비누 맛 나서 싫어하는데! 우리 식성이 진짜 비슷하네요.”


두 번째 우연에 민수의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그리고 결정타가 날아옵니다.


“혹시 3년 전에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갔었어요? 비 엄청 왔던 날?”

“네! 저 거기서 우비 입고 덜덜 떨면서 공연 봤는데!” “세상에, 저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어요! 친구들이랑 맨 앞줄 쪽에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 그때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겠네요.”


세 번째 우연이 겹치는 순간, 민수의 뇌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우연’이나 ‘확률’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운명(Destiny)’이라는 아주 위험하고도 달콤한 결론을 내려버리죠. ‘이건 우연이 아니야. 식성부터 취향, 과거에 갔던 장소까지 겹친다고? 나는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게 틀림없어.’




사실 냉정하게 따져볼까요? 20~30대 남녀가 유명한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고, 호불호가 강한 고수를 싫어하며, 인기 있는 페스티벌에 갔을 확률은 생각보다 높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뇌는 이런 통계적 사실을 싹 무시합니다.


우리 뇌에는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ACC)’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이곳은 패턴을 인식하고 예측하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 원시 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 “발자국이 있으면 사자가 있다”는 규칙(패턴)을 빨리 알아채야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뇌는 본능적으로 무질서한 사건들 속에서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지금 민수의 뇌는 ‘서윤’이라는 낯선 타인을 ‘확실한 내 짝’으로 정의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습니다. 그래야 안심하고 마음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개의 사건들을 ‘운명’이라는 하나의 실로 꿰어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은 억지로 깎아서라도 끼워 맞추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시작입니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해버리는 심리죠. 아마 서윤과 안 맞는 점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민수의 기억 속엔 오직 ‘우리가 얼마나 잘 맞는지’에 대한 증거들만 남게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 민수는 이 편향된 자료를 바탕으로 우연을 운명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귀인 오류(Attribution Error)’라고 합니다. 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현상을 말하죠. 민수는 지금 두 사람이 잘 맞는 이유를 단순히 ‘성격이 비슷해서’나 ‘우연’에서 찾지 않습니다. 대신 ‘하늘이 맺어준 특별한 인연이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돌려버리고(귀인하고) 있습니다. 확증 편향과 귀인 오류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인해 민수는 서윤을 둘도 없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맞는 건, 우리가 운명이기 때문이야.' 이 믿음은 앞으로 민수가 겪게 될 험난한 연애 과정을 버티게 해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짙은 색안경이 되기도 합니다.




식당을 나서는 민수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꼬실까’를 고민하는 전략가가 아닙니다. 운명을 영접한 독실한 신도가 되었죠.


“서윤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우리 진짜 통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저도요, 민수 씨.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수는 스마트폰을 꼭 쥐고 다짐합니다. ‘이제 절대 놓치지 않겠어.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이 운명을 지킬 거야.’


이 비장한 다짐과 함께, 민수의 뇌에서 이성적 판단과 계획을 담당하는 사령관인 ‘전두엽’이 서서히 퇴근 준비를 합니다. 사령관이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될까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병사들이 지휘권을 잡게 되겠죠. 그래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종종 이성적이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떻습니까? 이성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조금은 감정적인 결정들이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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