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몰입 편(1)
월요일 오전 9시, 대기업 S사의 마케팅팀 주간 회의 시간입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부장님이 이번 분기 KPI(핵심 성과 지표) 달성률이 저조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평소의 ‘김민수 대리’라면 펜을 굴리며 수첩에 꼼꼼히 메모를 하고, 부장님의 질문에 즉각 방어 논리를 펼쳤을 겁니다. 그는 팀 내에서 ‘일잘러(일 잘하는 사람)’로 통하니까요.
하지만 지금 민수의 영혼은 회의실에 없습니다. 그의 손은 책상 밑으로 내려가 있고, 엄지손가락은 쉴 새 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새로고침하고 있죠. 화면에는 서윤과의 카카오톡 대화창이 띄워져 있습니다. 마지막 대화는 10분 전, 서윤이 보낸 짧은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화이팅해요!"
고작 인사말일 뿐인데, 민수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씰룩거립니다. 심각한 회의 도중 혼자 실실 웃고 있는 김 대리. 그 모습은 마치 영구와 땡칠이를 연상케 합니다. 결국 부장님의 레이더망에 걸리고 말았죠. “김 대리! 자네 지금 웃음이 나와? 내 말이 우스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라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민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딴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아, 답장 뭐라고 보내지? 너무 빨리 보내면 할 일 없어 보이나? 5분만 있다가 보낼까?’
대체 왜 멀쩡하던 엘리트 사원 민수가 이렇게 멍청해진 걸까요? 사랑에 깊이 빠지는 순간, 우리 뇌에서는 아주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성적 판단, 충동 조절, 그리고 집중력을 담당하는 ‘전두엽(Prefrontal Cortex)’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저하되는 현상이죠.
뇌과학에서는 이를 ‘일시적 전두엽 기능 저하(Transient Hypofrontalit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뇌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깐깐하고 똑똑한 CEO(전두엽)가 갑자기 장기 휴가를 떠나버린 셈입니다.
CEO가 자리를 비우니 회사는 어떻게 될까요?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인턴 사원들(변연계, 편도체)이 사장실을 차지하고 파티를 벌이는 겁니다. “야, 일하지 마! 지금 보고서가 중요해? 서윤이한테 이모티콘 보내는 게 더 중요하지!” 이 인턴 사원들은 미래의 결과나 사회적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당장의 쾌락과 감정에만 충실하죠.
그래서 민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들을 연발합니다. 거래처에 보낼 메일에 첨부 파일을 빼먹고, 엑셀 수식에 오류를 내고, 점심 메뉴를 고르다가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죠. 그의 뇌 용량의 90%가 ‘서윤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에, 업무에 할당할 리소스가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오후 3시. 민수는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두고 곁눈질로 계속 확인합니다. 서윤이 보낸 메시지 옆에 있는 숫자 ‘1’이 없어졌는지, 답장은 왔는지 불안에 떨며 확인하게 되죠.
이때 민수의 뇌 속에서는 도파민이 펌프질하듯 솟구쳐 오릅니다. 도파민은 무언가를 ‘원하게(Wanting)’ 만드는 호르몬입니다. 서윤의 연락을 기다리는 이 초조한 시간 동안, 도파민 회로는 민수에게 끊임없이 명령합니다. “폰을 확인해. 연락이 왔을지도 몰라. 확인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연락이 바로 오면 도파민은 금방 시들해집니다. 오히려 연락이 올 듯 말 듯 할 때, 즉 보상이 불확실할 때 도파민 시스템은 미친 듯이 활성화되죠. 민수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서윤을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뇌과학적으로는 예측 불가능한 보상(답장)이 주는 자극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퇴근 후 만난 대학 동기들이 민수를 보며 혀를 찹니다. “야, 너 아까부터 폰만 본다? 우리 얘기 듣고는 있냐?” “어? 어, 듣고 있어. 근데 잠깐만, 답장 좀 하고.”
친구들은 변해버린 민수가 섭섭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수의 귀에는 그 어떤 잔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전두엽의 비판적 사고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너무 과한가?’라는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상태거든요.
민수는 이제 공식적으로 ‘서윤 24시간 대기조’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부르면 달려가고, 그녀가 울면 같이 울고, 그녀의 카톡 알림음이 곧 그의 세상 유일한 알람시계가 되어버린 남자. 회사에서는 ‘나사 빠진 김 대리’가 되었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바보입니다.
하지만 이 행복한 바보에게도 곧 위기가 닥쳐옵니다. 핑크빛 안경을 쓴 민수의 눈에는 서윤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슬슬 걱정스러운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과연 민수는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핑크빛 필터를 더 두껍게 깔아버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