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몰입 편(2)
평소의 민수는 시간 약속에 대해서라면 꽤나 가차 없는 사람입니다. 회사 회의실에는 늘 10분 먼저 도착해 자료를 정렬해두는 것이 그의 철칙이고, 친구들이 약속 시간에 5분이라도 늦으면 “내 시간은 금이야”라며 짐짓 엄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곤 했으니까요. 민수에게 시간이란 빈틈없이 관리되어야 할 자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민수는 주말 오후의 카페 창가에 30분째 혼자 앉아 있습니다. 서윤이 약속 장소를 착각해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죠. 평소라면 다리를 떨며 손목시계를 노려보고 있었겠지만, 지금 민수의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온화합니다.
유리창 너머로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서윤이 보입니다. 바람에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서윤이 숨을 몰아쉬며 말합니다.
“민수 씨, 정말 미안해요! 제가 길치라 지도를 거꾸로 봤지 뭐예요.”
그 순간, 민수의 뇌에서는 기적 같은 번역 과정이 일어났습니다. ‘약속에 늦은 무례한 사람’이라는 입력값이, ‘길을 잃어 당황한 아기 사슴’이라는 출력값으로 바뀌어 나온 것입니다. 땀 흘리는 모습조차 ‘지저분함’이 아닌 ‘순수한 열정’으로 보이기 시작했죠. 민수는 자신이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시원한 물을 건네며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서윤 씨 기다리면서 카페 구경도 하고 좋았어요. 천천히 숨 좀 돌려요.”
만약 입사 동기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김민수, 너 어디 아프냐?”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수는 아픈 게 아닙니다. 단지 그의 뇌가 ‘핑크 렌즈(Pink Lens)’라는 필터를 강력하게 장착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콩깍지’라고 부르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보지 않기로’ 작정한 상태에 가깝습니다. 뇌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뇌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셧다운’ 되어버린 셈이니까요.
영국의 신경미학자 세미르 제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 우리 뇌에서는 꽤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쾌락을 담당하는 영역은 축제처럼 불을 밝히는 반면, 전두엽과 편도체의 활동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전두엽은 “이 사람은 약속 관념이 희박해”, “이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라고 따지는 깐깐한 재판관입니다. 편도체는 “저건 위험 신호야”, “조심해야 해”라고 경고를 보내는 예민한 경비원이죠. 그런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 재판관과 경비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장기 휴가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민수의 눈에는 서윤의 ‘지각’이나 ‘길치’라는 결점이 입력되지 않습니다. 입력된다 하더라도 뇌는 그것을 ‘비난 거리’로 처리하지 않고, 도파민이라는 달콤한 소스를 뿌려 ‘내가 챙겨줘야 할 귀여운 빈틈’이라는 맛있는 요리로 바꿔버립니다.
이것은 뇌의 고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화론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전략이죠. 만약 우리가 처음 만난 이성의 단점을 현미경처럼 분석하고 비판한다면, 이 세상에 커플이 되어 자손을 남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뇌는 서로 다른 두 타인을 강력하게 접착시키기 위해, 잠시 비판의 눈을 멀게 하는 마취제를 놓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긍정적 환상(Positive Illus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연인을 실제보다,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이상적인 존재로 평가하곤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환상이 심할수록 커플의 관계 만족도가 더 높고, 연애가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가 서윤을 ‘완벽한 여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 시기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 뿌리를 가장 튼튼하게 내리게 하는 시기인 셈이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깁니다. 치약을 짜는 방식부터 연락의 빈도, 식습관까지 모든 것이 부딪힐 수 있죠. 이때 ‘콩깍지’는 자동차의 에어백이나 완충재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서윤이 밥을 먹다 옷에 국물을 흘려도, 민수의 뇌가 “칠칠맞지 못하네”라고 판단하는 대신 “인간미 넘치고 털털하네”라고 해석해준다면, 싸움이 될 일이 웃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이 시기에 쌓아둔 긍정적인 점수들, 즉 ‘환상의 마일리지’는 훗날 콩깍지가 벗겨지고 진짜 현실이 닥쳐왔을 때 관계를 지탱해주는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가끔 “제가 그 사람한테 너무 미쳐있는 것 같아요. 단점이 하나도 안 보여요. 제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라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은 좀 속아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마음껏 속으세요. 그건 뇌가 당신에게 건네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합법적인 마약 같은 거니까요.
술에 적당히 취하면 세상이 조금 더 부드럽고 너그러워 보이는 것처럼, 사랑의 호르몬에 취해 있는 지금은 상대방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일 겁니다. 이것은 당신의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니라, 당신의 뇌가 누군가를 깊이 수용할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입니다.
물론, 이 핑크색 렌즈의 유효기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길어야 18개월, 아니면 3년 정도일까요. 언젠가 민수도 서윤이 늦는 걸 보며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는 날이 올 테고, 서윤의 털털함이 조금은 거슬리는 무심함으로 느껴지는 오후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콩깍지가 벗겨진다는 건, 사랑이 식었다는 서글픈 증거가 아니라, 이제 비로소 ‘환상 없는 진짜 사랑’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일 테니까요.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상대를 마주했을 때도 여전히 그를 껴안을 수 있다면, 그건 뇌가 만들어낸 화학작용을 넘어선 어떤 견고한 무엇일 겁니다.
그러니 민수 씨, 지금은 마음껏 착각하셔도 좋습니다. “길치라서 내가 평생 데리고 다녀야겠다”는 그 귀여운 오만함이, 결국 두 사람을 아주 먼 곳까지 함께 걷게 만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