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몰입 편 (3)
세 번째 만남, 민수와 서윤은 살짝 조명이 어두운 이자카야에 마주 앉았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절반쯤 비워진 사케 병과 식어가는 어묵탕이 놓여 있습니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뇌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전두엽을 나른하게 마취시키는 시간이죠.
민수는 지금 서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애꿎은 어묵만 쿡쿡 찌르고 있습니다. 사실 민수의 머릿속은 지금 전쟁터입니다. 그의 뇌 안에서는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거든요.
‘지금 말할까? 아니야, 아직 일러. 오늘 분위기 좋은데 망치면 어떡해? 하지만 지금 안 하면 언제 해? 오늘 집에 보내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심장은 갈비뼈를 때리듯 뛰고, 입안은 바짝바짝 마릅니다. 평소 회사에서 수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도 이렇게 떨진 않았는데 말이죠. 민수가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거절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공포를 압도하는 강력한 욕망이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서윤이 민수의 농담에
“아, 진짜 웃겨요, 민수 씨!”
라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연스럽게 민수의 팔뚝을 툭, 하고 쳤습니다. 아주 가벼운 접촉,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수의 뇌에게 이 터치는 핵폭탄 스위치나 다름없었습니다. 뇌의 깊은 곳, 욕망의 용광로라 불리는 측좌핵(Nucleus Accumbens)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겁니다.
“지금이야! 저건 그린라이트야! 무조건 된다고!”
우리는 흔히 고백을 ‘용기 있는 자의 결단’이라고 포장하지만, 정신과의사의 눈으로 본 고백은 ‘보상 중추의 폭주’에 가깝습니다. 지금 민수의 뇌를 fMRI로 찍어본다면, 측좌핵 부위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을 겁니다. 이곳은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거나, 복권을 긁기 직전, 혹은 마약을 투여했을 때 활성화되는 쾌락과 보상의 중심지입니다.
측좌핵은 ‘현재의 피해’보다는 ‘미래의 보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서윤이 민수의 팔을 치며 웃어준 그 순간, 민수의 측좌핵은 ‘연인 관계’라는 거대한 보상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도파민을 쏟아내며 전두엽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앞뒤 재지 말고 질러. 이 주식은 무조건 상한가야. 전 재산 다 걸어!”
이때 도파민은 민수를 합리적인 투자자가 아닌, 눈이 뒤집힌 도박사로 만들어버립니다. 리스크(거절)보다 리턴(승낙)이 훨씬 커 보이기 시작하죠. 사실 서윤의 터치는 그저 친근함의 표시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파민에 절여진 뇌는 그 1%의 부정적 가능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립니다.
여기서 잠깐, 남자들이 유독 여자의 사소한 호의를 호감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저 여자가 나한테 웃었어. 나 좋아하는 게 분명해”
라는 식의 착각 말이죠. 이것은 민수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를 ‘오류 관리 이론(Error Management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원시 시대로 돌아가 봅시다. 이성을 대할 때 남자가 범할 수 있는 오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데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는 것(기회 상실). 둘째, 여자가 나를 안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들이대는 것(헛다리).
진화적으로 볼 때, 남자에게 더 치명적인 실수는 첫 번째입니다. 헛다리를 짚는 건 기껏해야 망신 좀 당하고 뺨 한 대 맞으면 끝이지만(비용이 적음), 기회를 놓치는 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기회를 영영 잃는 것(비용이 막대함)이니까요.
그래서 남자의 뇌는 ‘과소평가’보다는 차라리 ‘과대평가’를 하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민수가 서윤의 가벼운 터치를 ‘운명의 신호’로 확대 해석한 것은, 수만 년 전부터 내려온 그의 조상들이 물려준 “일단 찔러나 봐라”라는 유전자적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다시 이자카야로 돌아와 볼까요. 측좌핵의 선동에 넘어간 민수는 이제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입안에 맴돌던 말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혀끝을 밀어냅니다. 마치 댐이 무너지듯, 혹은 참았던 재채기가 터져 나오듯, 그것은 의지라기보다는 물리적인 압력에 가깝습니다.
“저기, 서윤 씨.”
“네?”
“우리, 만날래요? 아니, 제가 서윤 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 저질러버렸습니다. 준비했던 멋진 멘트도, 세련된 도입부도 다 날아가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 날것의 문장이 튀어나왔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민수의 입에서 떠난 말은 공중을 가로질러 서윤에게 닿았습니다. 이제 민수의 뇌는 도파민의 축제에서 깨어나, 갑작스런 정적과 마주합니다. 측좌핵이 난동을 부리고 지나간 자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편도체(공포 중추)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미쳤어, 김민수! 무슨 짓을 한 거야? 만약 아니라고 하면? 내일부터 얼굴 어떻게 봐?’
서윤의 입술이 달싹이는 그 짧은 3초의 시간. 민수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3억 년처럼 느껴집니다. 테이블 위의 촛불이 일렁이고, 민수의 심장은 이제 뇌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과연 민수의 측좌핵이 계산한 승률은 맞았을까요? 아니면 그저 도박사의 헛된 희망이었을까요? 답은 이제 서윤의 입에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