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왜 여자 앞에서 필요 없는 허세를 부릴까

정신과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몰입 편 (4)

by 정신과 의사 Dr MCT


이자카야에서 그 떨리던 밤, 민수가 뱉어낸 투박한 고백, 그리고 이어진 3초간의 영겁 같은 정적. 다행히 그 정적을 깬 것은 서윤의 수줍은 웃음과 "좋아요"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로 민수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주변을 맴도는 '아는 오빠'가 아니라,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민수는 서윤의 자취방 거실 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지만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5단 조립식 책장이 배송되었거든요.


"민수 씨, 설명서 같이 볼까요? 이거 꽤 복잡해 보이는데." 서윤이 시원한 물을 건네며 곁에 앉으려 하자, 민수는 손사래를 칩니다. "아니에요. 서윤 씨는 그냥 쉬고 있어요. 먼지 날리니까 저쪽 소파에 가 있어. 이거 금방 해."


사실 '금방' 할 상황이 아닙니다. 나사는 헛돌고 판자는 자꾸만 쓰러지려 합니다. 전문가를 부르면 3만 원이면 해결될 일이고, 둘이 하면 30분이면 끝날 일입니다. 하지만 민수는 굳이, 기어코, 혼자서 이 쇳덩이들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아, 이거 왜 안 들어가지?"라고 투덜대면서도, 표정만큼은 마치 성을 쌓는 영주처럼 비장하기 그지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고백에 성공했으니 편하게 데이트나 즐기면 될 텐데, 왜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걸까요? 그건 민수의 뇌 속에 흐르는 호르몬의 성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하면 '옥시토신'을 떠올립니다. 따뜻한 포옹, 몽글몽글한 애착을 만드는 호르몬이죠. 하지만 남자의 뇌에서 사랑을 '완성' 시키는 결정적인 성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바소프레신(Vasopressin)입니다.


이 호르몬의 위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초원들쥐(Prairie Vole)'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일부다처제이거나 짝을 자주 바꿉니다. 하지만 초원들쥐 수컷은 유독 한 암컷에게만 헌신하고, 평생을 함께하며 새끼를 돌보는 보기 드문 로맨티시스트입니다. 과학자들이 이 수컷의 뇌를 들여다봤더니, 바소프레신 수용체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면, 짝짓기가 끝나면 바로 떠나버리는 사촌뻘인 '산악들쥐'에게 인위적으로 바소프레신을 주입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바람둥이 쥐가 갑자기 한 암컷 곁에 머물며 다른 수컷들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가정적인 남편'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남자의 뇌에서 바소프레신이 분비되면, 사랑은 단순히 '설렘'을 넘어 '책임감'과 '보호 본능'으로 진화합니다.


서윤이 고백을 받아준 그 순간, 민수의 뇌는 서윤을 '내 사람', 그리고 그녀의 집을 '내가 지켜야 할 영역'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민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책장을 조립하는 행위는 단순한 노동이 아닙니다. 원시 시대로 치면 비바람을 막을 울타리를 치고, 맹수로부터 짝을 보호하려는 수컷의 본능적인 의식이 거실 바닥에서 재연되고 있는 셈입니다.




민수가 도움을 거절하고 굳이 혼자 힘을 쓰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소한 역할을 통해서 '자아 효능감(Self-Efficacy)'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주창한 자아 효능감은 '특정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성들은 관계 안에서 자신이 정서적으로 위로받을 때보다, 기능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임이 확인될 때 더 큰 효능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수에게 있어 "사랑해"라는 말은 물론 달콤합니다. 하지만 "민수 씨 덕분에 해결됐어", "역시 민수 씨는 못 하는 게 없네"라는 인정의 말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뼈와 근육을 춤추게 하는 찬사입니다.


민수는 지금 책장을 조립하며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봐, 나는 이 여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 나는 꽤 괜찮은 남자야. 나는 이 여자를 지킬 능력이 있어.'


이것을 흔히 '영웅 심리'라고도 부릅니다. 거창한 지구를 구하는 영웅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여자의 뻑뻑한 병뚜껑 정도는, 흔들리는 식탁 다리 정도는 내가 해결해주고 싶은 그 마음. 그 사소한 영웅 놀이가 민수에게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한 시간의 사투 끝에 드디어 책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맨 위 칸은 조금 비뚤어졌고, 나사 하나는 남았습니다. 하지만 땀범벅이 된 민수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가 걸려 있습니다. 서윤이 건네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합니다. "별거 아니네. 나중에 또 고장 난 거 있으면 말해."


어쩌면 서윤 입장에서는 전문가를 부르거나 같이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명한 서윤은 알고 있습니다. 저 비뚤어진 책장이 민수가 그녀에게 바치는 가장 몸을 쓴 사랑 고백이라는 것을요.


남자가 무거운 짐을 들려 할 때, 기계를 고치려 할 때, 길을 찾으려 할 때 굳이 뺏지 마세요.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어쩔 때는 고집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당신 앞에서 영웅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귀여운 본능의 표현입니다. 그에게 기꺼이 영웅이 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때로는 남자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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