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안정기 편(2)
매운 떡볶이는 서윤의 ‘소울 푸드’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날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식탁 위에는 빨간 떡볶이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고, 서윤은 젓가락으로 떡을 쿡쿡 찌르며 하루 종일 쌓였던 울분을 토해냅니다.
“아니, 김 부장 그 인간 진짜 이상하지 않아? 어제는 A안으로 하라더니, 오늘 임원 회의 끝나고는 왜 B안을 안 가져왔냐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내가 녹음이라도 해뒀어야 했는데, 진짜 억울해서 눈물 날 뻔했어.”
서윤의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매운 떡볶이 때문인지, 서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서윤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위로와 “그 부장 진짜 나쁜 놈이네!”라는 맞장구입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민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듣고 있던 민수는 서윤의 말이 잠깐 끊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엽니다.
“근데 원래 김 부장 스타일이 원래 강약약강이잖아. 네가 자꾸 받아주니까 만만하게 보는 거야. 내일 출근하면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어제 지시한 내용을 메일로 다시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해. 업무 지시는 무조건 근거를 남겨야 나중에 딴소리를 못 하지.”
순간, 식탁 위에 정적이 흐릅니다. 서윤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대신 차가운 냉기가 감돕니다.
“오빠는… 꼭 이럴 때 그런 얘기를 해야해? 내가 바보라서 그걸 안 한 줄 알아? 그 상황에서 어떻게 메일을 달라고 해? 그냥 내 편 들어달라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서윤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쾅’ 하고 닫힌 방문 소리에 민수는 멍하니 떡볶이만 바라봅니다. 민수의 뇌는 지금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울 정도라며?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 안 당하게 완벽한 해결책을 알려줬잖아.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도대체 민수는 왜 서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해결책’부터 들이밀었을까요? 뇌과학의 관점에서 변론하자면, 민수는 공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뇌가 서윤을 구하기 위해 너무 빠르게 ‘작동’했을 뿐입니다.
민수가 서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결론부터 내리려 한 이유는 남성의 뇌가 가진 독특한 연결성 때문입니다. 2013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라기니 베르마(Ragini Verma) 교수팀은 949명의 뇌 신경망 지도를 분석하여 남녀의 뇌 배선(Wiring)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뇌는 좌뇌와 우뇌를 잇는 좌우 연결(Lateral Connection)이 발달해 있습니다. 이는 ‘논리적 사실’과 ‘직관적 감정’을 통합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데 유리합니다. 반면, 남성의 뇌는 전두엽(인지/판단)과 소뇌(운동/행동)를 잇는 앞뒤 연결(Front-Back Connection)이 고속도로처럼 강력하게 발달해 있습니다.
이 ‘앞뒤 연결성’은 ‘입력(문제 인식) → 출력(행동 개시)’의 과정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된 구조입니다. 서윤이 “김 부장이 나를 괴롭혀”라고 말하는 순간(입력), 민수의 뇌는 복잡한 감정의 맥락을 살피기보다 본능적으로 뚫려 있는 고속도로를 탑니다.
‘문제 발생: 김 부장의 괴롭힘.’ ‘목표 설정: 괴로움의 원인 제거.’ ‘행동 개시: 증거 수집 및 대응 매뉴얼 제시.’
민수의 뇌 속에서는 이미 이런 연산이 0.1초 만에 끝났습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해결’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서윤이 “그냥 들어줘”라고 하는 것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뇌의 본성을 거스르는, 민수에게는 꽤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 셈이죠.
그렇다면 민수는 서윤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걸까요? 억울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2008년 슐테-뤼터(Schulte-Rüther) 등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의 뇌도 타인의 고통을 감지했을 때 공감 영역이 분명히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과 달리 그 활성화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곧이어 남성의 뇌는 ‘측두두정접합부(TPJ)’라는 부위를 강하게 작동시켰습니다. 측두두정부접합부는 ‘나’와 ‘타인’을 명확히 구분하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은 채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인지적 공감의 사령탑입니다.
즉, 민수의 뇌는 ‘공감’을 안 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 공감’에서 ‘인지적 공감’으로 급격하게 기어를 변속한 것입니다. 민수의 무의식은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서윤이의 마음에 불이 났다(고통). 같이 끌어안고 우는 것은 불을 끄는 데 도움이 안 된다. 빨리 소화기(해결책)를 가져와야 한다!’
민수가 말을 끊고 “메일을 보내”라고 한 것은, 서윤의 감정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괴롭히는 ‘김 부장’이라는 바이러스를 시스템에서 1분 1초라도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민수에게 있어 해결책을 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불이 났는데 구경만 하고 있는 ‘직무 유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슬프게도, 이 과학적인 사랑법은 서윤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서윤이 원한 건 ‘김 부장 퇴치’가 아니라 ‘내 마음의 진정’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해결사 본능’을 가진 민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지로 뇌 구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대신 뇌가 풀어야 할 ‘문제의 정의’를 바꿔주면 됩니다.
지금까지 민수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김 부장의 부당한 지시’로 설정했습니다. 이것은 민수가 직접 해결할 수도 없고, 서윤이 지금 당장 원하지도 않는 문제입니다. 이제 민수는 문제의 목표물을 ‘지금 엉망이 된 서윤이의 기분’으로 재설정해야 합니다.
‘문제 발생: 서윤이의 기분이 다운됨.’ ‘목표 설정: 기분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회복시킴.’’행동 개시: 적극적 맞장구와 공감.’
민수의 뛰어난 ‘앞뒤 연결성(고속도로)’을 이 새로운 목표에 적용하면 됩니다. “그 자식 진짜 나쁜 놈이네! 내가 가서 확 들이받아 버릴까?”라고 같이 화를 내주는 것. 이것은 민수 입장에서 빈말이나 감정 낭비가 아닙니다. 서윤의 뇌를 진정시키고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문제 해결 행위’입니다.
닫힌 방문 앞에서 민수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때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그러나 가장 완벽한 해결책임을 말입니다. 사랑은 때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에서부터 완성되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