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안정기 편 (1)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 서윤은 기대에 부풀어 민수에게 전화를 겁니다. “오빠, 내일 우리 어디 갈까? 교외로 드라이브 가서 예쁜 카페도 가고, 저녁엔 맛있는 거 먹을까?” 하지만 수화기 너머 민수의 목소리는 서윤의 기대와는 달리 한없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서윤아, 우리 이번 주는 그냥 집에서 쉬면 안 될까? 배달 시켜 먹고 넷플릭스나 보면서 뒹굴거리자. 나 이번 주 너무 힘들었어.”
서윤은 순간 말문이 막힙니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민수는 달랐습니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서윤을 데리러 왔고, 야근으로 눈이 뻘개진 상태에서도 서윤이 보고 싶다며 달려왔습니다. 주말마다 '핫플레이스'를 검색해 데이트 코스를 짜오던 그 열정적인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요?
다음 날, 서윤의 자취방에 온 민수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늘어진 티셔츠 바람으로 입을 벌리고 자는 그의 모습을 보며 서윤은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잡은 물고기라 이건가? 이제 나한테 잘 보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서윤의 눈에는 민수의 행동이 ‘변심’이나 ‘나태함’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뇌과학적으로 보자면 그는 지금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라, 뇌가 선포한 ‘비상사태’가 해제되고, 생존을 위한 항상성(Homeostasis) 회복 모드가 가동된 것입니다.
진화심리학에는 ‘구애 비용(Cost of Courtship)’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수컷 공작새가 화려한 꼬리를 활짝 펴는 것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 포식자의 눈에 띌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입니다. 즉, 구애는 목숨과 에너지를 건 ‘투자’입니다. 연애 초반 민수가 보여준 행동들은 바로 이 공작새의 꼬리와 같습니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돈과 시간을 쏟아부으며 서윤에게 헌신한 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수컷의 본능적인 ‘과잉 투자’였습니다.
하지만 공작새가 24시간, 365일 내내 꼬리를 펴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탈진해서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말 겁니다. 짝짓기에 성공하면 공작새는 꼬리를 접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먹고, 잠을 자며 소모된 에너지를 회복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입니다.
민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윤이라는 소중한 짝을 얻어 관계가 안정권에 접어들자, 민수의 뇌는 이제 ‘구애 모드’에서 ‘생존 모드’로 스위치를 전환했습니다. 더 이상 꼬리를 펴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비축하여 자신과 서윤을 지키고 미래를 도모하는 효율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민수의 ‘널브러짐’은 게으름이 아니라, 장기 레이스를 위한 진화적 최적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뇌과학적으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원리를 만나게 됩니다.
항상성은 체온, 혈당, 산성도 등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기본 성질입니다. 우리 몸과 뇌는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연애 초기의 ‘몰입’ 상태는 뇌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불균형 상태이자 비상사태입니다. 하루 종일 상대를 생각하느라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오르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우리가 ‘설렘’이라 부르는 이 감정은 사실 뇌에게는 ‘고강도 스트레스’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민수가 연애 초기의 그 열정적인 상태를 1년, 10년 계속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는 조기 사망하거나 심각한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릴 것입니다. 따라서 관계가 안정되면 뇌는 명령을 내립니다. “비상사태 해제. 이제 흥분 상태를 끄고, 원래의 편안한 상태로 돌아간다.” 지금 민수가 소파에 누워 멍하니 있는 것은, 그동안 서윤을 얻기 위해 과도하게 사용했던 에너지를 복구하고 뇌의 균형을 맞추려는 치유의 시간인 셈입니다.
이런 변화에는 도파민 수용체의 적응(Downregulation)이라는 신경학적 변화도 작용합니다. 연애 초반, 민수의 뇌는 서윤을 볼 때마다 도파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습니다. 짜릿하고, 황홀했죠. 하지만 우리 뇌세포는 강한 자극이 지속되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파민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의 숫자를 줄여버립니다.
이를 ‘하향 조절(Downregulation)’이라고 합니다. 마치 매운 음식을 처음 먹을 땐 땀을 뻘뻘 흘리지만, 매일 먹다 보면 덤덤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민수는 서윤을 봐도 예전처럼 심장이 터질 듯 뛰거나 도파민이 솟구치지 않습니다. 뇌가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서윤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 있지만, 이것은 민수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뇌세포가 ‘내성’을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남자에게 있어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동의어입니다. 불편한 직장 상사나 아직 어색한 썸녀 앞에서는 절대 소파에 누워 침을 흘리며 잘 수 없습니다. 긴장해야 하니까요. 민수가 서윤 앞에서 무장 해제된 채 가장 게으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서윤을 자신의 영역 안에서 가장 안전한 존재로 인식했다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권태기를 걱정하는 커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두 분, 이제 진짜 사랑을 시작하셨군요.” 도파민이 이끄는 맹목적인 열정은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고 찾아오는 ‘이완’의 시기야말로 관계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 때입니다.
민수 씨가 “나 좀 쉴게”라고 말할 때, 서윤 씨는 그 말을 “너랑 놀기 귀찮아”가 아니라 “너랑 있으면 쉴 수 있어”로 번역해서 들어주면 어떨까요? 화려한 맛집 대신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서로의 배를 베개 삼아 누워 각자 핸드폰을 하거나 멍하니 TV를 보는 시간. 이 ‘침묵의 공유’야말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도 서로의 배터리를 충전해주는 가장 가성비 좋고 튼튼한 사랑법입니다.
공작새는 꼬리를 접어야 밥을 먹고, 사자는 사냥할 때가 아니면 눕습니다. 당신의 남자가 당신 옆에서 널브러져 있다면 안심하세요. 그는 지금 당신이라는 둥지 안에서 가장 평화로운 숨을 쉬고 있는 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