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안정기 편 (3)
일요일 오후 2시, 민수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습니다. TV에서는 프로야구 중계가 한창입니다. 9회 말 2아웃, 1점 차 승부처. 투수의 손끝을 떠난 공이 포수의 미트에 꽂히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민수의 모든 신경은 브라운관 속 투수의 미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때,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던 서윤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오빠, 다음 주 토요일 우리 200일이잖아. 내가 말했던 한남동 그 파스타집, 지금 예약 안 하면 자리 없대. 오빠가 캐치테이블로 지금 예약 좀 해줄래?”
민수의 눈은 여전히 TV 속 야구공을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귀로는 서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파동으로 들어옵니다. 뇌의 언어 처리 센터를 거치지 않은 채, 민수의 입은 반사적으로 작동합니다.
“어... 알았어. 이따 할게.”
서윤은 “알았어”라는 대답을 들었으니 안심하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3일 뒤,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오빠, 이번 주 토요일 예약 확정 문자 왔어?” “어? 무슨 예약? 토요일에 뭐 있어?”
민수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본 서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집니다.
“아니, 일요일에 내가 분명히 지금 예약하라고 했잖아! 오빠가 알았다고 대답까지 해놓고 기억이 안 난다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민수는 억울해 미칠 지경입니다. 맹세코 예약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에 없는 일을 했다고 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서윤은 민수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민수의 뇌는 정말로 서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민수가 서윤의 말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주의력 부하 이론(Load Theory of Attention)’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닐리 라비(Nilli Lavie) 교수는 인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감각 정보의 총량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라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시각적으로 까다로운 과제(예: 숨은그림찾기, 십자말풀이, 혹은 160km로 날아오는 야구공 궤적 쫓기)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때, 뇌는 남은 자원이 바닥나 버립니다. 이때 뇌는 놀랍게도 청각 피질(Auditory Cortex)의 감도를 물리적으로 낮춰버립니다. 이를 ‘무주의 난청(Inattentional Deafness)’이라고 합니다.
즉, 민수가 야구 중계라는 ‘고부하 시각 정보’를 처리하느라 뇌의 에너지를 100% 써버리는 바람에, 서윤의 목소리는 고막까지는 도착했지만 뇌의 인지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입니다. 민수가 “어, 알았어”라고 대답한 것은 뇌가 아니라 척수 반사 수준에서 나온, 의미 없는 ‘생체 신호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서윤은 어떨까요? 서윤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민수가 "물 좀 줘"라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듣습니다. 왜 여자만 멀티태스킹이 잘되는 걸까요? 여기에는 뇌 구조적인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좌뇌(언어, 논리)와 우뇌(공간, 감정)로 나뉘어 있고,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를 ‘뇌량(Corpus Callosum)’이라고 부릅니다. 뇌량에 대한 여러 연구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뇌량의 연결성이 더 좋거나 상대적으로 두텁다는 결과를 제시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서윤의 뇌량은 ‘왕복 8차선 다리’입니다. 드라마(우뇌/시각)를 보면서도 민수의 말(좌뇌/언어)이 씽씽 다리를 건너와 통합됩니다. 반면, 민수의 뇌량은 ‘왕복 2차선 국도’에 가깝습니다. 야구 중계(우뇌/시각)에 트래픽이 몰리면 다리가 꽉 막혀버려 반대쪽에서 오는 언어 정보가 건너오지 못합니다.
남자의 뇌는 한 번에 하나만 처리하는 ‘모노 태스킹(Mono-tasking)’에 최적화되어 진화했습니다. 이는 사냥꾼 시절, 타겟 하나에만 집중해야 생존 확률이 높았던 흔적입니다. 반면, 채집과 육아를 담당했던 여성의 뇌는 주변의 위험과 아이의 울음소리, 동료의 말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을 발달시켰습니다.
서윤의 입장에서야 답답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민수의 잘못이라기보다 서윤이 ‘남자라는 기계의 사용 설명서’를 숙지하지 못해서 벌어진 작동 오류에 가깝습니다.
민수에게 TV를 보는 시간은 단순한 여가가 아닙니다. 뇌를 쉬게 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종의 ‘동굴(Cave)’입니다. 이 동굴 속에 있는 민수의 등 뒤에 대고 말을 거는 것은, 전원이 꺼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 대고 타자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정보를 입력해도, 기계가 ‘입력 모드’가 아니기 때문에 저장되지 않습니다. 고장 난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설계된 하드웨어인 것이죠.
그렇다면 서윤은 어떻게 해야 민수의 뇌에 자신의 말을 ‘저장’시킬 수 있을까요? 뇌과학적으로 올바른 접근법은 청각이 아닌 다른 감각을 이용해‘강제로 채널을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봐야 닫힌 귀에는 닿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TV와 민수 사이를 가로막아 시각 정보를 차단하거나, 어깨를 툭 치고 손을 잡는 촉각 자극을 통해 뇌의 주의력을 환기시켜야 합니다(물론 무작정 이런 침습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절차는 ‘아이 컨택’입니다. 민수의 눈동자가 TV에서 벗어나 서윤의 눈을 향해 정확히 초점을 맞추는 순간, 비로소 그의 뇌는 ‘야구 모드’에서 ‘대화 모드’로 로그인이 완료됩니다. “오빠, 빨리 해야 하는 거니까 지금 바로 해줄 수 있어?”라는 용건은 반드시 이 로그인 절차가 끝난 뒤에 입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서윤 씨, 민수가 대답을 안 한다고 혹은 기억을 못 한다고 화를 내는 건, 성능이 다른 컴퓨터를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민수는 당신을 무시한 게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그의 ‘입력 단자’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뿐입니다. 다음번엔 등 뒤에서 소리치는 대신, 그의 눈을 바라봐 주세요. 그래야 당신의 목소리가 그의 뇌에 닿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