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전문의가 들려주는 사랑의 뇌과학 안정기 편 (4)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의 어느 화요일 저녁. 퇴근길에 오른 민수는 문득 뜨끈한 국물이 생각납니다. 며칠 전부터 “순대국밥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서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민수는 기분 좋게 전화를 겁니다.
“서윤아, 퇴근했어? 오늘 날씨도 쌀쌀한데 우리 자주 가는 회사 앞 국밥집 어때? 수육 한 접시에 소주 한잔 딱 하면 좋겠는데.”
민수는 스스로 ‘센스 있는 남자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자친구가 먹고 싶어 했던 메뉴를 기억해 냈으니까요. 그런데 수화기 너머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1초, 2초, 3초… 길어지는 침묵 끝에 서윤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빠는… 오늘 같은 날 국밥이 넘어가? 진짜 너무하다. 끊어.”
뚜, 뚜, 뚜. 전화가 끊겼습니다. 민수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봅니다. ‘오늘 같은 날?’ 민수는 황급히 핸드폰 캘린더를 엽니다. 빨간 날도 아니고, 생일도 아닙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오늘 무슨 날’을 검색해 봐도 별다른 이슈가 없습니다.
그때, 민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숫자가 있습니다. 디데이 어플을 켜보니 선명하게 찍힌 숫자, ‘D+1000’.
민수는 그제야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한편으론 억울함이 밀려옵니다. ‘아니, 1주년, 2주년 챙겼으면 됐지 1000일은 또 뭐야? 내가 서윤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이 날짜 하나 못 외운다고 나쁜 놈 취급을 받아야 해?’
민수는 억울합니다. 그는 10년 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7차전 스코어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서윤과의 기념일은 자꾸 깜빡할까요? 이것은 민수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남녀의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파일 형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억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이고, 다른 하나는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입니다.
‘의미 기억’은 ‘이순신은 장군이다’, ‘독도는 한국 땅이다’처럼 사실(Fact)과 지식 위주의 기억입니다. 반면 ‘일화 기억’은 ‘지난주 여행에서 비 냄새가 났고, 그때 우리는 웃고 있었다’처럼 개인의 경험과 감정, 맥락이 담긴 기억입니다.
민수 같은 남성의 뇌는 상대적으로 ‘의미 기억’에 강합니다. 민수에게 ‘서윤을 사랑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명백한 ‘팩트’입니다. 팩트는 날짜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니, 굳이 ‘1000일’이라는 날짜를 세어가며 그 사실을 재확인할 필요성을 뇌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반면, 서윤의 뇌는 ‘일화 기억’을 중요시합니다. 서윤에게 1000일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지난 1000일 동안 쌓아온 우리 사랑의 서사, 그 영화 같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찍는 날입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대본을 잊고 “국밥이나 먹자”고 했으니, 서윤의 입장에서는 로맨틱한 영화가 순식간에 다큐멘터리로 바뀌어버린 셈입니다.
이 차이는 뇌 속 감정의 중추인 편도체(Amygdala)의 작용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UC Irvine)의 래리 카힐(Larry Cahill) 교수는 남녀가 감정적인 사건을 기억할 때 활성화되는 편도체 부위가 다르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감정적인 자극을 받을 때 남성의 뇌는 ‘우측 편도체’가 활성화됩니다. 우측 편도체는 사건의 ‘요점’과 전체적인 중심 내용을 기억하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반면, 여성의 뇌는 ‘좌측 편도체’가 활성화되는데, 이곳은 사건의 ‘세부 사항’, 구체적인 날짜, 그날의 분위기 등을 기억하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민수의 뇌는 ‘연애’라는 사건을 저장할 때 효율성을 발휘하여 ‘압축 저장’을 했습니다.
파일명: 내 여자친구 서윤
주요 내용: 나는 그녀를 사랑함, 우리는 함께함.
세부 사항: 1000일, 처음 만난 날의 날씨, 그때 입은 옷… (용량 확보를 위해 삭제됨)
즉, 민수가 기념일을 잊은 건 안심해서가 아닙니다. 뇌가 “가장 중요한 요점(사랑)은 이미 안전하게 저장되었으니, 날짜라는 자잘한 데이터는 삭제해도 좋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악의 없는 ‘데이터 최적화’의 결과인 셈이죠.
퇴근 후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 서윤은 입이 댓 발 나온 채 앉아 있고, 민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때 서윤이 해야 할 가장 현명한 대처는 무엇일까요?
"오빠는 어떻게 그걸 잊어?"라고 비난하는 것은 민수의 우측 편도체를 공격하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민수는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날짜 하나로 그래!"라며 논리로 맞설 겁니다.
서윤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민수의 ‘다름’을 인정하기로 합니다. 민수는 고장 난 게 아니라, 디테일을 처리하는 램(RAM) 용량이 적은 모델일 뿐이라는 것을요. 서윤은 부드럽게 입을 엽니다.
“오빠, 나는 우리의 추억이 한 편의 영화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나한테 1000일은 그냥 날짜가 아니라, 우리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을 찍는 날 중에 하나야. 오빠가 이걸 잊으면 나는 영화 필름이 뚝 끊기는 기분이 들어.”
민수의 눈이 커집니다. 비난이 아닌 감정의 설명을 듣자, 민수의 기계적인 뇌가 비로소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절대 아니야.”
“알아. 오빠는 요점은 잘 기억하지만 디테일에는 조금 약하잖아? 그래서 부탁이 있어.”
서윤은 민수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가져와 캘린더 앱을 켭니다. 그리고 1000일, 생일, 처음 만난 날을 입력하고 [매년 반복 / 3일 전 알람]을 설정합니다.
“오빠의 기억력을 탓하지 않을게. 대신 오빠가 달력을 종종 확인해줘. 앞으로 사랑은 마음으로 하고, 날짜 기억은 이 핸드폰 앱한테 맡기자. 알람 울리면 무조건 나한테 제일 맛있는 거 사주는 거야. 알았지?”
민수는 서윤이 돌려준 스마트폰을 받아듭니다. 화면에 뜬 ‘3일 전 알람’이라는 글자가 마치 서윤이 보내준 구명조끼처럼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그래, 앞으로 너만 믿는다 내 폰아.”
민수는 국밥집 대신 서윤이 가장 좋아하는 파스타 집을 예약합니다. 비록 민수의 뇌 속엔 여전히 ‘날짜’보다 ‘국밥’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압니다. 자신의 부족한 기억력을 기술로 보완해서라도 서윤의 ‘영화’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21세기의 가장 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법이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