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방문 전 알면 좋은 것들(4)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오니까 생각이 안 나요’
얘기를 하러 온 정신과 진료인데 막상 진료실에 들어오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환자들이 많다. 대부분의 의사-환자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수직적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먼저 질문을 하고 환자가 대답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거기다 의사 선생님은 바빠 보이고 뒤에 밀려있는 환자들도 많아 보인다. 나를 평가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정답을 말하듯 증상을 정확하고 빠르게 답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이 든다. 초조한 마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진료 본 후에 ‘아, 이 말을 하고 나올걸’ 하는 후회를 한다. 나 역시도 다른 과 진료를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의사 가운 입은 사람을 보면 괜히 위축된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볼 때는 그런 걱정을 내려놓아도 괜찮다. 요즘은 예약제인 정신과도 많아 시간에 대한 눈치를 많이 볼 필요가 없다. 정신과 의사는 당신의 진단에 대해서는 고민하겠지만 당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상한 얘기를 해도 괜찮다. 이미 정신과 의사들은 가벼운 이별 얘기부터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이야기까지 매일 듣고 있다. 너무 사소한 얘기라서 주저할 필요도 없다. 최근에 나는 수능이 끝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찾아온 젊은 환자도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이었지만 몇 번 치료 후 가벼운 마음으로 치료 종결을 했다. 내가 아는 어떤 정신과 의사의 환자 중에서는 진료실에서 자고 가는 환자가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만큼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된다. 급박할 필요도 없고 침묵이 이어져도 괜찮다. 그 침묵조차도 어떨 때는 도움이 된다.
그래도 할 말을 다 못하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싶은 얘기를 미리 적어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실제로 병원에 일기를 가져와서 참고해서 얘기를 하는 환자들이 많다. 나는 핸드폰이나 메모장에 감정 일기나 기분 상태 변화에 대해 간단히 적기를 종종 권유하는 편이다. 우울증 등의 많은 정신과 질환은 인지 기능 저하가 동반되어 회상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사실은 기억이 안 하고 나쁜 감정만 남아 감정 처리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때 증상 호전을 위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입 밖으로 내뱉는 환기(ventilation)가 무척 도움이 된다.
정신과 의사들은 대부분 기다림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오히려 반기는 사람들이다. 많은 고민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료를 오게 된다면 아무 얘기를 해도 괜찮다. 생각나는 대로 해도 괜찮다. 얘기를 아예 안 해도 괜찮다. 그저 편하게 왔다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