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핑계
내과 인턴 당직 시간.
병동으로 가면 다음날 해야하는 시술, 검사의 동의서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요즘은 태블릿을 이용해 전자문서로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벌써 라떼는...이 되어버렸다.)
인턴 개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다.
어서 빨리 병동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환자들이 잠들기 전에, 병동에 불이 꺼지기 전에 이 많은 동의서를 다 해결해야 한다!
우리에겐 동의서 말고 다른 일들도 너무 많다.
서둘러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병동을 순회한다.
화장실에 잠시 볼 일 보러 가시거나 자리에 안계시기라도 하면 매우 난감하다.
000님 어서 빨리 자리에 불러주세요! 스테이션에 외치고 다음 환자에게 먼저 다녀온다.
그렇게 매일 매일 몇 십명에게 내시경, 조직검사, CT 촬영 등의 동의서를 받게 된다.
인턴들은 아주 숙련된 멘트로 따발총처럼 다다다다다 간략하게 1분 남짓한 시간안에 2-3장 되는 동의서 내용을 설명하고 싸인을 받고, 싸인을 하게 된다. 환자가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 확인할 틈도 없다.
내일 수면으로 위 내시경 하실건데요, 해보셨죠?
하시다가 부득이하게 합병증으로 출혈, 천공, 감염, 같은 합병증이 올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저산소증이 오거나 추가적으로 입원, 수술 하시게 될 수도 있어요.
블라블라~
그럼 이제 여기 싸인해주세요.
인턴들끼리 모여 '토 나오게 쌓여 있는 동의서'에 대해 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그냥 다음날 내시경할 사람들 한 방에 다 불러 모아서 한 번에 자세히 시술 과정과 합병증을 설명해주고 동의서 나눠주고 싸인하게 하면 안될까, 녹음해서 틀어주면 안될까 등등.
실제로 다른 병원에서는 인턴이 동의서를 그렇게 받은 적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우리에게는 수 십번, 수 백번 반복되는 업무이지만 환자에게는 단 한 번 일어나는 검사일 수 있고, 아주 중요한 일일 수도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나마 환자들이 젊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면 다행이다. 대부분 나이가 많으시고, 내가 하는 말을 알아는 들은건지 알 수 없는 분들도 너무 많다. 보호자가 옆에 있으면 설명하고 대신 싸인을 받거나, 전화로 동의서를 받을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대부분은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모든 시술과 검사들이 잘 끝난다.
하지만 나는 수면 위내시경 받다가 저산소증으로 뇌손상이 되어 평생을 침대에서 지내게 된 젊은 여자도 본 적이 있고, CT 찍다가 조영제에 쇼크가 와 의식을 잃은 사람도 봤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불가항력적'으로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모든 부작용이 가능성이 '0'은 아니기 때문에 환자들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사전에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고, 의료진도 알려줄 의무가 있다.
가끔은 난감할 때가 있다.
제가 CT를 찍는다구요? 왜 찍는데요? 어딜 찍어요?
아니 내가 어떻게 알아. 주치의가, 교수님이 찍자니까 찍는건데. 왜 환자는 모르고 있는거지 ?
환자에게 쥐뿔도 모르면서 단순 업무를 해치우던 나도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문제는 절대적으로 과다한 업무량과 부족한 시간이다.
주치의도 바쁘고, 인턴도 바쁘다.
주치의는 자기 환자에게 뭐 때문에 CT를 찍어 봐야 할지 설명해줄 시간도 없고, 인턴은 인턴대로 환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기계처럼 시술을 설명하고 싸인을 받는다.
가끔은 덜컥 겁이 날 때도 있다. 학창시절 <의료분쟁조정중재위원회>에 실습 나갔을 때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던 사례는 바로 <설명 불충분>이었다. 자칫하면 내 면허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인턴들에게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충분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이렇게 동의서를 받다가는 <설명의사 OOO>에 적힌 내 이름과 서명 탓에 언제 어떻게 발목이 잡힐지 모른다. 설명 잘 해주는 의사가 되겠다는 것이 나의 목표였는데, 이런 대학병원 환경에서는 나의 다짐과 노력따위 아무 쓸모가 없다.
언제쯤 정상적인 환경에서 일해볼 수 있을까 ?
한국 의료 환경이 천지개벽하는 날을 꿈꾸어 보는 인턴 개미의 당직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