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지만 기대하게 되는 것들
2003년 11월~2008년 10월, MBC 예능 프로그램 ‘행복주식회사’에서 출연자들이 일주일간 1만 원으로 사는(버티는) 체험을 하며 잔액이 많이 남아 있는 쪽이 승리하는 도전을 했다. 일명 ‘만 원의 행복’ 프로젝트. 당시 1만 원으로 일주일을 살기 위해 짠내 나는 소비와 절약으로 고군분투하며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저게 가능해?’ 했던 이 프로그램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나던 날. 돌이켜 보면 계획대로 진척이 되지 않아서 조바심이 나 있던 참이었다. 글은 써지지 않고 주변의 소리와 잡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한참을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 밖으로 나왔다. ‘시장이나 들러볼까.’
시장 가는 길목에는 전집, 곱창집, 양꼬치집이 이어져 있다. 곱창집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테이블에서는 반주(飯酒)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 어귀에 꽃집을 찾은 손님은 주인에게 달맞이꽃이 있느냐 물었고 곧이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른 오후의 시장 골목은 비교적 한산했다.
옷가게, 할인마트, 그리고 몇 개의 상점들을 지나 한 팝업매장을 지나고 있었다. 매대 앞에 사람들이 북적여 무엇인지 살펴보니 모자였다. 안 사도 되니 구경하고 써보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행인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모자들이라며 백화점에 들어가는 메이커(브랜드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구경이나 해볼까.’ 그리고 예상되는 바와 같이 나는 몰려든 행인들 사이에서 이것저것 써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주인아저씨의 유쾌한 입담과 나 하나에 집중되지 않을 상황에 마음 편히 써보았던 것 같다. 보터햇, 버킷햇, 썬캡 등 다양한 모자가 아이스콘마냥 쌓여 있었다. 라탄, 린넨, 면, 합성섬유 등의 소재에, 꽃무늬, 기하학무늬, 단색 등의 컬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모자의 가격은 모두 1만 원씩. 가격이 싸서 주변에 선물한다며 여러 개를 사간다고 했다. “있을 때 하세요.”
값이 얼마든 간에 불필요한 물건은 되도록 사지 말자는 주의인 나. 허나 어차피 필요한 물건이라면 미리 사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합리화로 날 설득시키며 모자의 모양과 색, 디테일을 빠짐없이 살폈다. 그리고 벙거지형 모자를 선택했다.
주인아저씨가 여러 개를 사면 할인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딱 1개만 골랐다. 모자가 다 잘 어울린다는 넘치는 인사를 뒤로하고, 기존에 쓰던 것보다 챙이 넓어 자외선 차단에 좋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연이은 소비로 이어지지 않은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잘 이겨냈어!’
새 모자를 쓰고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걸으면서 상점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이 맛에 쇼핑하는 거지.’ 머리가 개운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하나 더 살까.’
‘하나면 충분해.’
‘나중에 사려고 보면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충동구매 안 하기로 했잖아.’
‘1만 원이면 싼데, 할인도 받을 거고.’
‘꼭 사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
‘예쁘잖아. 고민할 시간에 사자!’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던 생각이 결국 그렇게 기울어 다시 매장으로 향했다.
주인아저씨는 조금 전과 같은 멘트로 호객을 했다. 매대 앞에 새로운 손님들이 분주히 모자를 써보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큰 목소리로 “이거 한번 써보세요, 최신 유행하는 모잡니다. 백화점에 납품하는 **모자예요.”라고 외치며, 앞 손님에게 권하고 다음 손님을 맞았다.
“모자 하나 더 사려고 왔는데요.”
나는 봐두었던 모자를 찾아 얼른 계산하고 나왔다. 물론 약간의 할인도 받았다. 주인아저씨는 처음에 갔을 때나 이후에 갔을 때나 새 손님을 맞기에 바빴다.
‘뭐지? 이 씁쓸한 기분은.’ 2개를 사면 기분이 2배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명백한 내 착각이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듣기 좋은 말과 소비욕에 들떠 순진하게도 지갑을 연 것일까, 모자 판매 전문가의 조언과 값싼 비용으로 나쁘지 않은 소비를 한 것일까. 이러나저러나 결정은 내 것이었다. 그날 나는 마음에 드는 모자 2개를 구입하고 덤으로 허기(虛氣)를 얻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