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 대전으로 가는 기차역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 후속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저는 평소 작품들의 개봉 일자에 맞춰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아닙니다.
영화가 인기를 끈 후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기 시작해질 때쯤에야 ‘이제 한번 봐 볼까?’ 하고 보는 편이죠
하지만 이번 <조커: 폴리 아 되>가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곤 곧장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전작의 메시지,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명과 호아킨 피닉스의 몰입감 있는 연기들은 이번 조커 후속편에 기대감을 심어주기 충분했거든요
깊은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관에 들어간 저는 영화가 끝나자 자리에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해한 소재들을 예술적으로 풀어낸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예술성에 감탄한 것이죠.
그렇게 감탄하며 영화관을 나오는 도중 뉴스 기사를 보는데 이게 웬걸, 이번 조커 작품이 혹평을 받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의문스런 마음에 이번 작품이 왜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화 함께 글을 읽으며 한번 생각해보죠.
영화에 구성, 메시지를 중심으로 영화에 대해 분석해보자구요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조커: 폴리 아 되>가 주는 메시지,
전작 <조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사회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몰입감 있는 조명이었습니다.
웃음 발작이 있는 우스운 광대인 아서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받는지, 또 이러한 폭력적인 시선 속에서 아서가 어떻게 ‘조커’로 변해가는지 아서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 외면받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는 작품들은 항상 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 <앵무새 죽이기> 또한 당시의 인권 문제를 다뤘다는 점이 그 작품성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작 <조커>가 그렇게나 큰 호평을 받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까닭은 그 메시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감독의 역량과 호아킨 피닉스의 몰입감 있는 연기 또한 주요했겠지만요.
이번 작품의 메시지는 심플합니다.
‘너희들, ‘조커’와 그에 공감하는 추종자들, 나아가서는 관객들까지 ‘조커’의 행동은 그저 과대한 정신병적 행동일 뿐이다‘라는 것이죠
’조커‘의 행동은 그저 하나의 쇼, 연기일 뿐이고 이는 두려운 사회에 대한 도피일 뿐이라고요.
사회에 외면받은 사람들이 다시금 그 사회를 외면하기 위해 ’조커‘라는 가면, 분장을 하고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것이라고요
그렇기에 이 영화는 <폴리 아 되> 공유 정신병 장애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일견 당연하고 보수적인 메시지로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파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앵무새 죽이기>를 빗대어 보면 후속작에서 갑자기.
’흑인 인권은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적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인생의 원인을 자신들의 흑인 정체성에서 찾는 현실 도피이다.‘
’인권 운동을 하는 자신에 취하지 말고 인권 운동가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라‘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수준이거든요.
전작 <조커>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더 나아가 전작을 통해 이해받고 위로받은 사람들에게 이번 작품은 큰 배신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는 이번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 작품성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고요.
저 또한 이번 작품에 메시지에는 정말 부정적인 편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추가적인 말은 이후 글 말미에서 다루기로 하자고요.
우선 작품의 메시지는 잠시 잊어두고 작품의 요소들이 극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그리고 분장
이번 <조커: 폴리 아 되>를 보며 감독이 칼을 갈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조커 후속편을 잘 만들고 싶다‘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졌달까요.
작품 내부의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작품의 주제의식을 은유하는 모습들은 감독의 역량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뮤지컬, 애니메이션, 분장을 통해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먼저 영화의 다양한 장치들 중 뮤지컬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봅시다.
<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하고 든 생각은 ’왜 영화를 뮤지컬로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위대한 쇼맨‘, ’시카고‘와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영화 자체 내용이 공연과 관련된 내용이거나 뮤지컬이 먼저 만들어지고 영화가 뒤이어 제작되는 경우거든요.
그렇기에 이번 조커가 뮤지컬 영화로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영화를 보는 순간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작가의 메시지와 뮤지컬이라는 소재는 환상적으로 어우러졌으니깐요.
작품이 하나의 예술 작품임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의 ’킥‘이랄까요? 하하^^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것의 모든 요소에 작가의 의도가 들어갑니다.
그렇기에 이번 <조커: 폴리 아 되>의 뮤지컬적 요소 또한 작가의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죠.
어떠한 평론가는 뮤지컬적 요소가 ’조커와 할리퀸의 정열적 사랑을 상징한다.‘ ’작가는 둘의 낭만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뮤지컬적 요소를 사용했다.‘라고 주장하더라고요.
저는 이러한 해석은 반대합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들어맞으려면 모든 뮤지컬적 묘사는 ’조커‘와 할리퀸’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하거든요.
조커가 법원에서 난동 아닌 난동을 부린 후 정신 병동에서 죄수들이 ‘성인들의 행진할 때’를 때창하는 장면이나 인터뷰 도중 담배를 뺏어 물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Bewitched’를 부르는 장면.
결정적으로 ’조커‘가 법원이 폭파되고 ’할리퀸‘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하는 장면은, 뮤지컬이라는 요소가 단순히 조커와 할리퀸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요소라는 해석에 의문점을 줍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왜 뮤지컬적 요소를 차용했을까요?
그것은 ’조커의 행동은 과대한 연기다‘라는 이 극의 메시지를 부각하는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뮤지컬이 뭘까요? 뮤지컬이란 결국 연기입니다. 관객들도, 배우들도 그 연극에 몰입해 있지만 결국 뮤지컬은 진짜가 아닌 연기일 수밖에 없어요.
작가는 이러한 뮤지컬적 요소를 통해서 ’조커‘와 그에게 전염된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의 과장된 가면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조커‘가 간수들에게 무시당하고, 자신의 트라우마가 자극받을 때, ’할리퀸‘과 서로의 망상을 주고받으며 행동이 점점 과격해질 때 뮤지컬적 요소가 사용되죠.
이는 ’아서‘가 법원에서 트라우마를 자극당하고, 이를 참지 못하며 자신을 ’조커‘라고 선언할 때 뮤지컬을 통해 극을 진행하는 모습이 결정적이였습니다.
작품을 바라볼 때 뮤지컬적 장면들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작가의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으로 바라보면 ’조커‘가 ’할리퀸‘에게 제발 노래하지 말라고 사정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죠.
’조커‘는 ’할리퀸‘에게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할리퀸‘은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노래하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조커 입장에서는 제발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봐 주고 진심으로 대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시작부터 ’할리퀸‘의 거짓말-신분을 속이고 가정사를 속이는-로 시작됐던 관계가 이렇게 마무리된다고 생각하니, ’할리퀸‘은 한 번도 ’아서‘를 진심으로 바라봐 주지 못했네요.
물론 작품에서 뮤지컬이란 단순히 과장된 행동을 은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뮤지컬이 ’조커‘의 과대한 망상이 그에게 영감을 받은 ’할리퀸‘, 그리고 또 다른 ’조커‘들에게 전염되며 서로에게 공유되며 점점 커지는 ’폴리 아 되‘의 매개체로서 상징되기도 하고요.
이러한 다양한 요소로 사용된 뮤지컬은 작가의 예술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두 번째로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아봅시다.
영화는 루니 툰 시절 워너브라더스 로고와 인트로 송과 함께 애니메이션이 나오며 시작합니다.
애니메이션에는 조커와 조커의 그림자가 나오죠
조커의 그림자는 마치 하나의 인격체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심지어는 조커를 가두고 조커의 몸을 뺏기까지 하죠.
이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영화 초반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조커‘는 ’아서‘를 ’조커의 그림자‘는 ’조커‘를 상징합니다.
말하고 보니 말이 이상하네요.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하나만 짚고 넘어가죠.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조커‘의 행동은 하나의 과장된 연기다.’라고 이야기 했었죠.
여기서 조커의 과장된 연기를 ‘조커’, 연기를 뺀 본연의 모습은 ‘아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고요.
그림자는 조커가 되어 지나가는 여성에서 강제로 키스를 하거나 부자들을 두들겨 패는 등,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대면서 무대에 오른다. 그 후 경찰이 찾아오자 쇼를 실컷 즐긴 그림자는 조커를 다시 아서에게 되돌려준 뒤 도망치고, 아서는 그토록 원하던 조커를 되찾았지만 그림자가 조커가 되어 한 짓까지 전부 뒤집어쓰는 바람에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린치당한다.
돌아가서 이 애니메이션에서 ‘조커’와 ‘조커의 그림자는’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몸을 뺏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심지어는 가두기까지.
이를 통해 우리는 ‘아서’와 ‘조커’는 서로 다른 인물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애니를 조금 더 영화에 맞닿게 설명하자면, ‘아서’가 자신의 과장된 행동들에 휩쓸려서 범죄를 저지르며 다니다가(‘조커’가 됨/그림자에게 몸을 빼앗김) 정신을 차린 후 뒷감당을 못 하는 모습? 후회하는 모습을 상징하죠.
이를 더 간단하게 설명하면 ‘아서’가 ‘조커’가 되고 이를 나중에 ‘아서’로서 감당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 하나하나로 작품의 주제의식을 은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짧으니 이렇게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걸로 하죠.
세 번째로 조커 분장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커 분장은 말 그대로 ‘조커’를 상징합니다. 조커 분장을 안 할 때는 ‘아서’ 조커 분장을 할 때는 ‘조커’. 쉽죠?
마찬가지로 조커 분장을 한 시민들도 ‘조커’ 조커 분장을 하는 할리퀸도 ‘조커’입니다.
이 극에서 결국 ‘조커’라는 것은 공유 정신병 장애로 서로가 서로에게, 나아가 대중들에게 광기를 전염시킨 결과거든요.
누구든지 ‘조커’가 될 수 있죠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까지도요.
또한 조커 분장은 과장된 연기, 가면을 상징합니다. 애초에 ‘조커’가 과장된 행동과 가면을 상징하기도 하지만요.
사실 조커가 ‘과장된 행동’. ‘가면’을 상징한다는 것을 ‘조커 분장’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표현 한 것이긴 합니다.
초반에 ‘아서’는 분장을 하지 않고 나타납니다. 시작에서 아서는 마치 합묵증에 걸린 듯 병동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죠.
아서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머릿속에서 어머니가 과거 자신을 학대했다는 정황이 담긴 병원의 진단서와 서류철들이 마구 넘어가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자꾸 만천 하에 공개되는 것으로 공황 증세를 보이던 아서는 그의 망상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현실의 아서는 더는 이 상황을 못 견디겠다면서, 대뜸 변호사를 해고하겠다고 소리치고 그녀에게 작별키스를 날린 뒤, 피고인의 자기변호권을 주장한다.
재판부는 아서의 스스로를 변호하겠다는 주장을 조건부로 받아들이고, 다음 재판부터 아서는 조커 분장을 하고 출석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조커’의 영향을 받은 할리퀸을 만나고, 그녀에게 인정받으며, 서로 광기에 차오르다가. 재판 과정에서 무시당하기도 하고,트라우마를 자극당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커’라는 가면을 선택하죠.
자신의 변호사를 해고한 아서는 이제 ‘조커’가 됩니다.
이후 장면에서 ‘아서’는 ‘조커 분장’을 하고 다시 재판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과장되고 우스운 행동으로 마치 연극을 하듯이 행동하죠.
여기서 조커 분장으로 ‘아서’가 ‘조커’가 되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후 극이 진행되며 ’조커‘는 자신이 조롱한 병동의 간수에게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간수는 ’조커‘에게 너의 행동은 모두 허세인 것을 안다고, 아무리 연기해 봤자 자신에겐 전부 보인다 말하죠.
간수는 아서의 광대 복장을 강제로 벗기고 광대 분장도 지워 버리게 됩니다. 분장이 반쯤 지워진 ’조커‘는 간수의 말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듯 행동하죠
이후 분장이 지워진 후의 ’조커‘는 최종 변론에서 자신이 사실 ’아서‘고 자신이 ’조커‘처럼 행동한 것은 자신의 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간수에게 강제로 벗겨진 조커 가면을 간수가 조커 분장을 지우는 것으로 형상화한 것이죠.
이렇게 작가는 조커 분장을 통해 아서가 지금 ’조커‘로서 존재하는지. ’아서‘로서 존재하는지를 은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분장의 그 본래 의미처럼 ’가면‘을 상징하기도 하죠.
우리는 이렇게 <조커: 폴리 아 되>에 사용된 여러 장치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사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공감을 하실 수도,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들이라면 이해하시기 어려울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최대한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는데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작품에 메시지를 위한 여러 장치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3가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론 영화 초반부의 간수들에게 호송되던 ’아서‘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우산 색이 ’조커‘의 옷 색으로 바뀌는 장면
또한 인상 깊은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조커의 옷 색은 묘사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조커의 상징색인 ’초록‘색이 빠진 모습은. 영화 초반부의 ’아서‘가 ’조커‘가 아닌 ’아서‘로서 존재했다는 모습을 은유한다고 보이죠.
이러한 다양한 장치들이 있었지만 우선 위 3가지, 뮤지컬, 애니메이션, 분장 3가지 요소를 위주로 설명을 진행해 보았습니다.
’조커‘ 인권영화에서 희극으로
이번 작품의 여러 가지 요소, 소재에 대해서 알아보며 <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빠지면 안 될 것이 있죠. 바로 메시지에 대한 이야깁니다.
조커 1편의 메시지는 우리 사회의 ’조커‘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심도 있는 묘사와 조명이었습니다. 아무도 다루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흥행을 견인했고, 큰 사회적 파장을 주었던 것이죠.
아서: ... 당신은 끔찍해, 머레이.
Me? I'm awful? Oh yeah, how am I awful?
머레이: 내가? 끔찍하다고? 그래, 내가 어떻게 끔찍하다는 거지?
...Playing my video, Inviting me on the show. You just wanted to make fun of me. You're like the rest of them!
아서: ...내 영상을 틀고, 날 방송에 불러냈잖아. 그냥 날 비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당신도 다른 놈들하고 똑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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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about another joke, Murray?
아서: 농담 하나 더 해줄까, 머레이?
No, I think we've had enough of your jokes.
머레이: 아니, 자네 농담은 이만하면 된 것 같군.
What do you get...
아서: 당신 말이야...
I don't think so.
머레이: 어림없어.
when you cross a mentally ill loner,
아서: 사회에서 버림받고, 쓰레기 취급당하는,
I think we're done here now, thank you.
머레이: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수고했네.
with a society that abandons him and treats him like trash?!
아서: 외톨이 정신병자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서가 권총을 꺼내 머레이를 살해한다.)
세상에 무시받고 기대를 외면당한 외톨이 ’아서‘가 어떻게 ’조커‘가 되어갔는지. 우리 사회에 문제를 날카롭게 조명했던 전작은 미국 경찰이 조커 영화관에 경찰들을 투입했을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었죠.
하지만 이번 작품은 다릅니다. 이번 작품의 메시지는 오히려 전 작의 대중들, 머레이와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요.
’아서‘가 왜 ’조커‘가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조커‘의 모순점과 나약함에 초점을 옮긴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 약자들의 모순점, 상처에서 비롯한 과잉한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입니다.
사회에 소외감을 느끼고 무시당하던 ’조커‘가 다시 그 사회에 칼을 휘두루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죠
하지만 그 약자의 모순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왜 그들이 그런 극단적 행동을 하기까지 내몰렸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세상에 밟히고 살아가던사람들의 꿈틀거림마저 그저 정신병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것은 또 다른 ’조커‘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사회에 ’아서‘와 같이 소외받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수많은 ’아서‘들을 ’조커‘로서 양성해가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조망하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독이 왜 이러한 메시지를 던졌는지 이해도 됩니다.
조커가 처음 개봉되고 미국 영화관에는 경찰이 출동하고, 한국에는 서현역 등지에서 정말 안타까운 사고들이 발생하고. 뉴스를 보던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아서‘들을 ’조커‘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어요.
자신의 영화가 ’폴리 아 되‘처럼 사람들에게 잘못된 답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번 후속편은 이런 친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작품을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의 메시지가 작품 평가의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작품의 메시지에 공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공감하지 못하거든요. 결국 작품의 메시지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지라는 측면을 제외하고 조커라는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조커 안에 담겨진 다양한 요소들, 예술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즐겁게, 영화에 쓴 돈이 아깝지 않는 인상 깊은 영화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조커: 폴리 아 되>를 보고 다양한 요소들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