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리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저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니체의 문학적 표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유려한 문장에 빠져 사상적으로 빠져들게 되기도 하니 말이다. 시처럼, 하나의 음악 가사처럼 수려한 문장들의 구성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니체의 철학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윤활제가 되어준다, 또한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대표되는 니체만의 창의적인 비유들 또한 책을 읽을 때의 훌륭한 재미요소가 되어준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이렇게 높은 명성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것에는 비단 높은 문학성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가치는 길 잃은 사람들에게,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그리하여 스스로가 멸망의 길을 걷고있는 자들에게 길을 제시하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는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공동체주의와 종교라는 두 가치를 제시해왔다. 사람들은 처벌과 명예를 위해, 또 도덕과 사랑을 위해 살아갈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보자.
자본주의의 확산과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확산되었다.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는 이제 전통적인 가치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성과 합리의 차디찬 표면은 공동체주의라는 견고한 성을 깨부수는 공성추가 되었다. 성벽이 깨지고 성문이 부서진 공동체주의는 더 이상 사람들을 지키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가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너진 자리에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과, 계층의 층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콘크리트의 울타리는 견고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을들 품어줄 듯 그 장엄한 위용을 뽐내던 과거의 성벽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 콘크리트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지 않는다. 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은 자본이라는 출입증이 없다면 입구조차 들어가지 못했으니.
굳건한 성벽은 성벽 내부의 사람들을 모두 지켜줄 수 있다. 하지만 좁은 위치게 높게 올라선 건물은 많은 사람들을 포옹하지 못한다. 높은 층수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차디찬 빌딩 하층에 몰려있게 되고, 그마저도 불가능한 사람들은 빌딩의 보호조차 받지 못했으니.
깎아지듯이 높이 솟아오른 새 울타리는 사람들에게 목표의식조차 되어주지 못한다. 열심히 생을 살아가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태생’(상속)의 거대한 현실을 마주하여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니.
그리하여 전통적인 공동체의 성벽에 의지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빌딩 밖에서, 지하에서 절망에 빠진 체 추위에 떨게 되는 것이다.
울타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은 난로를 찾아 떠난다. ‘종교’라는 이름의 난로이다. 아! 이 얼마나 따뜻한 울림인가. 추위에 떠는자, 옷가지를 필요로 하는자, 길 잃은자, 한때 자신을 떠났던 자마저 품는 그 이름 난로여! 사람들은 난롯가에 삼삼오오 모여 따뜻함을 나눈다. 난로의 온기에, 온기를 원하는 서로의 몸을 비벼가며 추위를 버틴다.
하지만 이마저도 마찬가지이다. 이성과 합리의 차디찬 몸뚱이는 그 거대한 온기마저 앗아갔으니! 그들 마음속의 얼음은 그들이 난롯가에 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난롯가의 이방인으로서, 적대자로서 쫒겨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나 말하리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잃은 난로여 너 그 불길을 잃어버릴지니!
자. 이제 현대인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길을 잃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울타리는 무너졌으며 높디높은 자본의 건물에 자신의 자리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건물 밖 추운 거리에 내몰려 따뜻한 불길조차 쬐지 못하는 그들은 차디찬 손과 발을 비벼댈 뿐이다. 이 얼마나 처량한 것이냐. 마음속의 얼음이 너무나 차디찬 나머지 그들은 서로 온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 떨고 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 이제 현대인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길을 잃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울타리는 무너졌으며 높디높은 자본의 건물에 자신의 자리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건물 밖 추운 거리에 내몰려 따뜻한 불길조차 쬐지 못하는 그들은 차디찬 손과 발을 비벼댈 뿐이다. 이 얼마나 처량한 것이냐. 마음속의 얼음이 너무나 차디찬 나머지 그들은 서로 온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 떨고 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답을 제시한다. 방향과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한다. 지금 겪고있는 추위에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길 잃은 자들에게 크나큰 힘이 된다. 실현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말뿐인 조언은 힘이 없지만 할 수 있음직한 해결책은 힘이 되어주는 법이다.
길 잃은 자들은 추위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온기나눌 길 없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눈보라 날리는 차디찬 눈밭으로 내몰린 것뿐이다. 그들 내면의 얼음이 너무나 단단한 나머지 온기를 나눌 수 없었을 뿐이다. 서로에게 다가서 몸을 비벼보았자 너무나도 차디찬 몸뚱이에 몰라 떨어질 수박에 없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추위를 벗어나라는 조언은 의미가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몰린 자들에게 선택하라는 말이 얼마나 차디찬 조언인지.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추위에 자부심을 느끼라고 말한다. 오오 추위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지.
오오 추위에 내몰린 자들에게 이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오오 추위에 떨고있는 그들에게 이 얼마나 힘이 되어주는 말이란 말인가.
오 길 잃은 자들의 선지자, 차라투스트라 예언자 그대여!
평생에 걸쳐 무시받고, 부정당했던 눈보라의 인생이 긍정받는다니. 추위에 떨고있는 그대들이여 그대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가.
자신들이 선택한 추위가 아니라고.
자신들이 원했던 눈보라가 아니라고.
그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고.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 느꼈던 그 절망감을 그대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이제, 그대들이여 말하라. 그대들을 조롱하고 비난하였던 세상에게. 따듯한 빌딩 옥상에서 그대들을 동정하였던 그들에게, 마음속에 어떤것도 들어있지 않아 따뜻한 난롯가에 태연자약하게 누워있는 저들에게 말하라. 내몰린 그대들에게 선택을, 변화를 말하던 세상에게 외쳐라.
그대들이 난로를 선택하지 않음을 말하라!
그대들 마음속 차디찬 얼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라!
그대들 건물 밖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감을 말하라!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속편한 이야기들만을 해대는 저치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대들 추위에 떨며 느꼈던 마음속 응어리짐을 말하라!
그대들 의지할 곳 없어 손발을 비벼대던 간절함을 말하라!
그대들 그리하여 스스로 달려 열을 내게 되기까지의 고뇌를 말하라!
언제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난로가 없어본 적 없는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대들 그대들의 행복에 대해 말하라!
그대들 스스로의 오만과과 자부심에 대해 말하라!
그대들 그 무엇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눈보라 속을 꿋꿋이 살아감을 말하라!
그대들 차디찬 삶 속에서도 춤을 추며 살아감에 오만함을 담고 말하라!
그리하여 세상 나약한 존재들을 열등하게 여겨 바라봄을 자랑스레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차디찬 눈보라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아 차라투스트라 신 그대여!
그대는, 따뜻함 속에서도 자립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하고자 하였으나 따뜻함을 찾을 수 없어 그대의 품으로 도망쳐 온 자들을 품고 있구나.
그대는, 그대의 대적자이자 친구를 얻고자 하였으나 그대를 숭배하는 자들만이 보이는구나,
그대는, 그대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자들을, 그대를 혐오하고 조롱할 수 있는 자들을 원했으나 그대 주변에는 그대의 말을 진리로 여기는 자들뿐이니!
그대 얼마나 차디찬 눈보라 속을 살아가는 것인가. 나 오늘 여기에서 그대 차라투스트라에게 연민을 느낄지어다. 이 얼마나 차디찬 추위인가, 두려울정도로 컴컴한 어둠이요 공포스러운 고독감이니. 나 그대와 다른 길을 걷기를 소망하노라.
그리하여 나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