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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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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Nov 02. 2015

당신의 방은 당신의 세계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좋을

학부시절 문예비평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방은 세계죠. 가족들과 지내는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아마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는 친구들은 알 거예요. 방은 말이죠, 외롭고, 고프고, 슬프고, 기쁘고 이런 감정들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하는 공간이에요. 그래서 방은 세계죠"


당시에 나는 교수님이 지칭한 가족들과 지내는 친구였다. 그래서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방이 세계랑 뭔 상관 이람.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스물여덟에 자취를 시작해 그 안에서 별 짓을 다 하며 살면서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됐다. 아! 나의 방, 나의 발가벗은 진짜 세계!



나의 첫 자취 방은


나의 첫 자취방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10만짜리 원룸이었다. 말이 원룸이지 0.5룸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직사각형의 작은 방이었다. 방에는 가구랄 게 없었다. 천장에 고정시키는 행거 하나와 침대, 식탁 겸 책상이 전부였다. 커튼이나 블라인드 따위는 물론 없었다.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월세가 싼 방이 최고라는 생각에 선택한 방이었다.


내 방은 비탈이 심한 다세대 밀집 지역에 있었다. 동네에 중국어로 된 간판이 많았는데, 지내다 보니 이곳이 조선족 밀집 지역이란 걸 알았다. 소소한 사고가 많아 새벽에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깨는 일도 잦았다. 당시만 해도 혈기 왕성한 20대 청년이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놈의 방 구석에 정이라고 할만한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느끼는 초조함에 방이 주는 불편과 불안. 이런 것들이 뒤섞이며 당시의 내 감정 상태에도 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방에서는 늘 답답함을 느껴, 퇴근하면 안락해 보이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덕분에 늘 피곤함을 느꼈다. 계약 기간 2년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이사를 결심했다.


이곳은 천국이구나


두 번째 자취방 역시 원룸이었다. 하지만 부엌과 방이 미닫이로 구분된 방이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1.5룸! 방 주변도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넓은 창문을 열면 소나무가 손에 닿는 거리로 서있었고, 늘 조용하고 쾌적했다. 물론 월세는 쾌적하지 않았다. 보증금 3000만 원에서 월세 50만 원짜리 방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월세는 불가피한 기회비용이라 생각했다.



이 방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퇴근 후 돌아와도 카페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누워 쉬고, 읽고, 보고, 썼다. 종종 술도 사다 마셨고, 헤어진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 울기도 했다(취했었다). 발가벗고 방안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원래 꿈을 되찾겠다며 입사원서를 새로 쓰기도 했다. 이때의 방은 그야말로 내 세상이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감정에 겹겹이 끼워둔 필터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대로의 내가 머무는 공간이었다.


교수님이 말한 '방은 세계'란 말도 이때에 불현듯 생각났다. 오롯한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였구나 싶었다. 물론 당시에 주변 환경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회사일도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안정적인 시기였다. 그럼에도, 방이라는 공간의 힘이 컸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월세, 그 무서운 이름


1.5룸에 구축한 나의 세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안정감이 커지면서 비로소 월세 부담에 눈을 뜬 것. 매달 50만 원씩 12개월이면 600만 원. 2년 계약을 꽉 채우면 1200만 원. 계약기간 총액을 따져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월세는 그럭저럭 버틸만했지만, 2년 동안 1200만 원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고민 끝에 가까운(당분간 결혼할 계획이 없는) 형과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계획은 이랬다. 혼자서는 답이 없으니 둘의 (먼지 같은)자금을 합쳐 월세 걱정 없는 쾌적한 전셋집을 구한다! 이런 애초의 계획에서 '쾌적한'은 결국 일부 후퇴했다. 발품을 많이 팔아봤지만, 전세라는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세금 1억 3천의 투룸을 구해 입주해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지금의 내 세계, 내 방은 이전 방에 비해 많이 작아졌다. 대신 부엌이며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 첫 자취방에 비하면 넉넉한 환경이다. 3번의 이사를 경험하는 동안 붙은 요령도 큰 도움이 됐다. 이제는 방이 작든 크든, 환경이 어떻든 방이라는 세계를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다.


안타까운 건


아직 자취 경험이 없는 사람들. 이제 막 취업한 후배나, 아직 미혼인 동료들이 조언을 구해오면, 나는 늘 혼자 살아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가족조차 없는 오롯한 당신의 세계에 잠시라도 몸을 담가보라고, 발가벗은 은 자신을 들여다 볼 절호의 찬스라고 이야기한다(물론 성향에 따라 만족도는 천차만별).


안타까운 건, 그러기 위해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안정적 환경의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 요즘 같아서는 전세는 꿈도 못 꾼다. 그렇다고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저당 잡힐 미래가 불안하다. 싱그러운 미혼남녀가, 이제 막 꽃을 피는 청춘들이 소박한 자신만의 방을 가지는 일이, 그 안에서 양껏 울고 꿈꾸고 하는 일이 지금보다 더 수월해지기를 바란다 (당장 나도 내년이 매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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