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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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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May 01. 2016

당신의 과거와 나의 미래

우리는 시간을 넘어 닿아있다

작은 카드 지갑만 달랑 들고 다니는 나는, 천 원짜리 지폐나 동전이 생기면 일단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는 편이다. 덕분에 내 오른쪽 바지 주머니엔,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오천 원 미만의 지폐나 동전들이 늘 짤랑거린다. 이 주머니 속 돈들은 주로 카드를 내밀기 어려운 상황에 꺼내진다. 편의점에서 과자나 껌을 살 때, 노점의 짭잘한 오뎅 국물 냄새에 이끌릴 때 나는 주머니에 손부터 넣어보곤 한다.

모처럼 약속 없는 쉬는 밤. 밀린 인간극장이나 볼 요량으로 아껴둔 캔맥주를 꺼냈다. 같이 씹을 거리가 필요했지만, 냉장고엔 생수, 생수, 그리고 생수뿐이었다. 대충 걸쳐 입고 집 앞 편의점엘 나갔다. 꿀을 발랐다는 이 천 원짜리 아몬드 한 봉지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습관처럼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천 원짜리 세 장이 있었다. 두 장을 세어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내밀었다.


어어! 잠깐만요!


아르바이트 학생이 깜짝 놀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고, 나는 건네다 만 지폐를 빤히 쳐다봤다. 두 장의 지폐 중 한 장에 뭔가 적혀있었다. '다시 돌아와라 2013.5.10 금'. 그동안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볼펜으로 적은 글자들이 희미해져 있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의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지폐를 꺼내 아몬드 값을 치르고 편의점을 나왔다.



이날 밤 인간극장은 보지 않았다. 대신 맥주를 홀짝거리며 천 원짜리 지폐를 이리저리 돌려 봤다. 무슨 생각으로 적었을까. 글씨체로 봐선 여자분인 것 같은데. 몇 살일까. 특별한 날이었을까. 친구들과 함께 있었을까. 어디에서 적었을까. 시끌벅적한 금요일 밤의 카페에서? 아니면 고요한 새벽 책상머리 앞에서? 난 저날 뭘 하고 있었지? 괜스레 들떠 온갖 잡다한 생각을 이어나가다, 박스에 넣어둔 2013년 수첩을 꺼내 들춰보기에 이르렀다.


나로부터 당신에게
당신으로부터 나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소박한 소망이 담긴 천 원짜리 지폐는 아직도 내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있다. 어쩐지 더 지니고 싶어 여태 내보내질 못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대단할 것 없는 일이다. 지폐며 동전이야 늘 돌고 돈다. 팔십 먹은 시골 할머니의 쌈지에서 나와, 고사리 같은 어린 손녀의 손을 잠시 거쳐, 마트 계산원이나 떡볶이 장수, 꽃집 아가씨, 담뱃가게 아저씨로 이어진다. 체취를 품은 손 때가 차곡차곡 쌓인다.



돌고 도는 게 돈 뿐은 아니다. 내가 잡았던 지하철 손잡이, 잠시 앉았던 벤치, 도서관의 책들, 피팅룸에서 입고 신어봤던 옷이며 신발들.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당신에게, 당신으로부터 나에게 이어진다. 정말 재미있는 건 이렇게 이어지며,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누군가 3년 전 지폐에 남긴 글자 몇 개가 나의 휴일 밤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짧은 글도 한 편 만들어냈다. 3년을 돌아 나를 슬쩍, 툭 건드렸다.


기적 같은 세상에


대학 복학을 준비하던 2010년. 용돈을 벌기 위해 여의도에 있는 큰 회사에서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난생처음 접한 대기업은 공기가 무거운 곳이었다. 직원으로 있는 형 누나들은 늘 긴장한 표정이었고, 가끔은 상급자의 고성도 들렸다. 반쯤 주눅이 들어 3개월간의 일을 마치고 마지막 퇴근을 앞둔 어느 날, 평소 훤칠하니 멋지다고 생각했던 직원 형이 명함을 건네며 인사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죠?".

별생각 없이 번호를 저장해둔 게 6년 전의 일이다. 어느 밤 무심히 메신저 앱을 훑어보다 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마 기억 못하실 텐데..". 처음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그가 이런저런 질문으로 기억을 맞춰보기 시작했다. "아아! 기억나요! 와 정말 신기하네. 이렇게 연락해줘서 고마워요! 무슨 이런 기적 같은 일이!".



그의 말대로 우리는 기적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큰 수영장의 1번 레인에 있는 당신과, 99번 레인에 있는 나. 도무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와 구조에도, 물살을 가르는 당신의 손끝이 일으킨 파동이 결국은 내 몸에 와 닿는 그런 세상.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신과 내가 시간을 넘어 은근하게 맺어지고 닿아지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이 천 원짜리 지폐를 떠나보낼 생각이다. (지폐에 낙서를 해서는 곤란하지만..) 글씨 주인에게 다시 한 번 스쳤으면 하는 사심을 담아, 희미해진 글자들 위로, 글씨체를 최대한 살려 선을 덧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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