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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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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Nov 02. 2018

끼얹어지는 풍경

어떻게 살아도 괜찮겠다 싶은 순간


속이 다 시원하게 트인 겨울 동해 바다나, 광활하게 펼쳐진 몽골의 초원, 3000m가 넘는 고산의 설경이나 극지방 오로라 같은 풍경이 있다. 서울 기준으로 짧게는 220킬로미터에서 멀게는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리고 올라야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가끔은 먼 길 여행하지 않고도 어물쩍 이런 풍경 한가운데에 놓여있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대부분은 등하굣길이나 출퇴근길이다. 나의 경우는 해질 무렵 한강 다리를 건너는 지하철이나, 외곽순환고가 위를 달리면서 종종 그런 풍경을 마주했었다.



사람이 만든 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빛나고 물든 풍경만 남으면, 나는 늘 '여기에 살고 있었다'며 각성하곤 했다. 내가 이 계절에 이 시간에 살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얼음물처럼 끼얹어졌다. 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했지만, 이런때 만큼은 어떻게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일이나 돈, 욕심이나 후회 같은 것들이 속을 더럽히면 '그것 만큼 안 중요한 것도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연습을 했었다. 도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내가 24시간 정신을 차리고 살 순 없으니, 필요한 순간만이라도 정신을 차려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늘 그런 연습을 하기로 결심했던 사실 자체를 잊은채 아주 빠르게 제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면에서 약발이 듣지 않는 중얼거림 보다는, 어물쩍 다가오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진득하게 봐두는 편이 더 낫겠다 싶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멀리 오르고 떠나는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마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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