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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Aug 21. 2016

예민함의 발견

나는 몰랐네, 나의 '관계적 예민함'에 대해

예민-하다 (銳敏-)

1.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2. 어떤 문제의 성격이 여러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하고 그 처리에 많은 갈등이 있는 상태에 있다


생활기록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 동안 내 생활기록부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장이 있었다. '외향적이고 무던한 성격으로 교우들과..'. 실제로 그랬다. 나는 진득하니 앉아 공부하기보다는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PC방으로 쏘다니길 좋아했다. 나는 친구들이 좋았고, 친구들도 나를 좋아했다. 엄마는 이런 아들이 걱정이었다. 아들에게 친구가 너무 많고, 덕분에 공부가 뒷전인 게 늘 고민이셨다.


그 많은 친구들과 나는 좀처럼 싸우는 일이 없었다. 남자아이들이라면 한 두 번쯤은 있음 직한 주먹다짐도 없었다. 누군가를 때려본 적도, 맞아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친구들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속 시원히 대화로 푼 기억도 많지 않다. 그저 치고받을 정도로 심각한 갈등 자체를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활기록부에 적힌 대로 나는 외향적이고 무던한 남자아이였다.


서운하다는 말


이전과 다르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였다. 여전히 우르르 몰려다니길 좋아했지만, 대여섯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던 다른 아이들과는 소원해졌다. 특별히 이유랄 것도 없었다. 모두와 가까이 지내는 게 피곤했다. 대여섯 친구들이 중요하고, 그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들과는 여전히 가까이 지내고 있다. 그렇다고 관계에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안 되는 친구들 안에서도 편한 친구,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친구가 나뉘었다. 자연히 편한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당연히)그런 마음이 밖으로 베어 나와, 지나고 나면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서운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게는 모두에게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애틋한 마음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자연스러운 감정과는 드러나는 차이가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들게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났다는 생각


친구들에게 서운하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종종 스스로 '모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상황이든 늘 따뜻하고 유쾌한 친구를 보면서 그런 생각에 더 깊이 잠기기도 했다. 12년간 내 생활기록부에 적혀있던 '외향적이고 무던한' 나는 어디로 갔을까. 변한 것이라면 언제, 왜 변해버린 걸까. 과거를 찬찬히 되짚어본 밤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치관이나 성격을 한 번에 뒤흔들만한 사건은 역시 없었다.


2014년부터 2년여간 하우스 셰어를 했다. 가까이 지내던 P와 같이 살게 됐다. P와는 10년여를 알고 지낸 학부 선후배(사실상 친구) 사이다. 우리는 알고 지낸 시간 동안 크게 부대낀 적 없이 없었다. 덕분에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셰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P와 나는, 지난 2년간 숱하게 충돌하고 부대꼈다. 대부분은 내가 불을 붙이고 P가 불을 끄는 식이었다.


P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나는 가끔 "형 미안해, 내가 좀 모난 구석이 있나 봐"하며 멋쩍게 화해를 청했다. 언젠가 이런 밤, P는 "모난 게 아니라 좀 예민한 구석이 있는 거지"라는 말로 화해를 받아주었다. 당시에는 '예민하다'는 말이 어쩐지 욕으로 들려 황소처럼 씩씩거리긴 했지만, 처음 들어본 말이기도 해서 두고두고 그 의미에 대해서 곱씹어 보게 됐다.


관계적 예민함



'나는 예민한 사람인가'. 사실 이 질문에 '예'라는 대답을 하기에 나는 둔한 구석도 많은 타입이다. 먹고 자는 일상적인 것들에는 대체적으로 둔감한 편이다. 질문을 조금 구체적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내가 특별히 예민하다고 느끼는 구석이 있나'. 바로 떠오르는 건 사람들과의 관계다.


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한다. 오랜 친구든, 낯선 사람이든 그렇다. 오랜 친구와의 대화는 매실장아찌가 든 유리병 같다. 언제든 열어 오래전에 넣어둔 잘 절여진 매실을 나눠먹는 기분이다. 그에 비하면 낯선 이들과의 대화는 남의 집 냉장고 문을 여는 기분이다. 궁금하고, 기대된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어디까지나 둘 혹은 셋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나 가능하다.


대화를 할 때, 나는 보통 상대의 표정이나 말투, 톤의 변화를 잘 잡아낸다.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되고, 상대나 대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모여있는 사람들이 다섯, 여섯, 일곱…이 되면 이런 대화가 불가능하다. 말이 넘치고 빨라서 금세 피곤해진다. 말 그대로 '몸이 피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나의 이런 성향이 그동안 많은 오해를 만들기도 했다. 지난날 P가 내게 했던 말처럼, 나의 크고 작은 사람과 관련된 문제들은 이런 '관계적 예민함'에서부터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콕 짚어 이렇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비교적 예민한 기질을 지닌 사람은 아닐까.


손톱 모양 같은


최근 '둔감력'을 다룬 기사를 많이 봤다. 관계가 넘치는 시대에 덜 상처받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둔감력'을 키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일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타인의 경우는 모르겠다. 다만 나 스스로 생각하는 '예민함'은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저마다 약간씩 다른 '손톱 모양'같은 게 아닐까. 다듬을 수 있지만, 모양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나의 경우, 사람들과의 관계에 '예민한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누구도(심지어 생활기록부 조차도!) 알려주지 않아서 자각이 늦었고, '예민함'을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받아들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기질을 귀하게 생각한다. 다만, 연습이 조금 필요한 것 같다. 종종 이런 기질이 뾰족하고 날카롭게 변해 뜻하지 않게 타인의 상처가 되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당신은 가끔 피곤한 사람인데, 난 그래서 당신이 좋다는 K와, 모난 게 아니라 예민한 구석이 있는 거라는 P. 둘에게 가끔 미안하고, 대체로 고맙다는 말로 이 장황한 글을 마쳐야겠다.

김까치 소속 직업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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