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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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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Sep 19. 2016

왜 사냐는 질문

살아가게 하는 '순간들'을 찾는 글쓰기

어느 날 회사 후배가 내게 물었다. "선배님은 왜 사십니까?". 나를 탓하거나 놀리는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질문'이었다. 배경을 듣자 하니 누군가에게서 같은 질문을 들었는데,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단다. 명색이 선배인지라, 후배에게 그럴싸한 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음 그러니까 말이지, 나는 기왕이면 사람들에게.." 틀렸다. 자문을 거듭해도 '어떻게 살고 싶다'는 말만 나올 뿐, '무슨 이유로 살고 있는지'에는 닿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종종 이 문제적 질문을 곱씹었다. 하지만 여태껏 '일단은 태어났으니 산다'는 무쇠 같은 말 외에는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머릿속이 대책 없이 하얗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떠오르는 과거의 몇몇 장면들과 거기서부터 비롯한 감정들이 있었다. 말이나 문장으로 정리가 되지 않을 뿐, 그 장면들과 감정들이 '답 비슷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이것저것 들춰보다 바버라 애버크롬비의 <작가의 시작>을 집어 들고 가게 소파에 앉았다. 반쯤 누워 대충 떠들더보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 끝이 즐거워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따로 정리하겠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왜 사냐'는 질문을 떠올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책이, 매일의 글쓰기가 그 답을 구해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읽은 부분을 아래 옮겼다.


드라마 <인 트리트먼트 In Treatment>에서 정신과 의사로 분한 배우 가브리엘 번은 인터뷰를 통해, 심리 요법이 우리의 진짜 인생 이야기를 인정하고 인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특정한 것들을 과장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정한 것들을 이상화하고 여타의 것들을 부인하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일(그리고 인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듯 보인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기울여 특정한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허구로 전환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 50p. '삶을 쓴다는 것'


자신의 가족과 함께한 아침 식사가 어땠는지 (혹은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 어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자신의 첫 키스, 부모님이 개를 사줬을 때의 (혹은 사주지 않았을 때의) 기분, 어릴 때 좋아하던 신발, 어릴 때 즐겨하던 놀이, 즐겨 듣던 음악, 가족끼리의 농담 또는 농담 없는 엄숙한 분위기를 묘사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자신뿐이다. 과거는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내 남동생은 여섯 살 때 아이보리 비누를 파서 그 안에 10센트짜리 동전을 넣어놓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나는 어느 날 목욕을 하다 처음 동전을 발견하고 신기해하며 감탄했다. 결국 동생은 자신이 한 일이라고 고백했다. 그 아이는 또한 세 살 때 우리 집 고양이의 꼬리를 주황색으로 칠해 놓기도 했다. 이제 우리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남동생과 나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썼으니 여러분도 알게 되었다. 78p.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떠올린 장면들


'왜 사냐'는 질문 앞에 내가 늘 떠올린 장면들은 한 여름 퇴근길에 올려다본 화려한 노을, 막 도착한 낯선 나라의 공항 문 밖 풍경, 그때 맡았던 찬 공기의 냄새, 땡볕도 마다않고 맛집 앞에 길게 줄 선 아저씨들, 꽃 선물을 받은 직후의 여자 친구 얼굴같은 것들이었다. 대게 이런 장면들은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나 맡았던 냄새, 느꼈던 기온 같은 것들과 하나로 묶여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떠올리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진다.


사실 이런 장면들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어쩌면 이 질문 속 '왜'는 '어쩌다가'가 아니라 '무슨 힘으로'에 더 가까운 의미 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모아두면, 언젠가 다시 "왜 사냐"는 질문을 받을 때 잊지 않고 금방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매일이 더 인상적이고,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매일매일


보통은 개인적으로 괴로운 사건이 있거나, 여러 날을 곱씹게 되는 일이 있을 때 글을 쓴다.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다. 손에 잡히지 않고 엉망으로 떠다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일단 쓰고 나면 차분하게 내려앉아 그다음으로 넘어갈 힘이 생겨 그렇게 한다. '글쓰기는 구원'이라는 말이 숱하게 도는 시절에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그날의 인상적인 장면을, 슬쩍 지나간 마음들을 기록하는 일을 더 자주 하려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같은 장소에서, 매일 쓰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익숙한 책상은 아무래도 자꾸 도망치게 되어서, 앞으로는 조금 낯선 식탁에서 쓰게 될 것 같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아침 9시에 내 방에 가서 12시까지 종이를 앞에 놓고 앉아 있다. 세 시간 동안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앉아 있을 때도 많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는 알고 있다. 만약 9시에서 12시 사이에 어떤 소재가 떠오르면 그것을 적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수년 전 수업에서 나의 글쓰기 선생님이 들려준 이 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영감 자체를 아주 조용하게 다룸으로써 글쓰기의 드라마에서, 그 특별함에서 바람을 빼버린다. 드라마 따윈 없다. 우리는 그저 앉아 있어야 한다. 소재가 떠오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냥 그렇게 앉아 있다. - 56p. '엉덩이로 쓰는 글'


글 쓸 시간을 정해놨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접촉해야 하는 불꽃, 즉 시상이나 영감, 혹은 가슴, 그 밖에 무어라 부르든, 그것은 그 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당신은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기로 한다. 혹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덜컥 겁이 난다.
   매리 올리버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약속을 하고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가정해본다. "어느 한쪽이 겁이 나서. 또는 다른 일로 바빠서 늦었다면 로맨스도 열정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글을 쓰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여기에 비유한다. "당신이 확실하게 약속을 지킨다면 그쪽도 제시간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이 도착하는 순간, 그쪽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불꽃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가슴이 침묵하게  만들지 마라. 시간을 정하고 약속을 지켜라. - 60p. '영감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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