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언덕이다. 비빌 수 있는 언덕이다. 그러니까 마음껏 비벼라. 소떼나 양 떼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 살아가는 거다.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너의 비빌 언덕은 아빠다”
한 방송인이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남긴 말. 아내가 우연히 보고 이야기해준 장면이다. 아내는 자신도 아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은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을 따온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누구나 의지할 곳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 시작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모두가 크든 작든 언덕 하나씩은 디디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내와 나는 아들이 태어난 날 부모가 되었다. 요즘의 아들은 먹고, 자고, 싸는 모든 일들을 전적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을 의지해 삶을 시작하고 있다. 대략 십수 년, 앞으로도 아들은 우리에게 의지해 자라날 것이다. 젓가락 잡는 법, 세수하는 법, 양말을 신는 법, 인사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배워나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와 나는 아들이 디디고 태어난 언덕이다.
엉성하고 부족한 마음
오랜만에 장시간 외출한 아내 없이 종일 아들을 돌봤다. 점심 즈음부터 울기 시작한 아들은 내리 두 시간을 울었다. 나는 쩔쩔매다 결국 아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태어난 지 겨우 두 달을 갓 넘긴 아들은 제가 할 수 있는 언어로 나에게 어려움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아들의 언어를 이해하지도, 느긋하게 기다려주지도 못했다. 아들에게 미안했고, 스스로 부끄러워 어디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이제 막 흙을 쌓아 올려 풀 한 포기 제대로 돋아나지 않은 엉성한 언덕이다. 60cm 남짓한 아들이 간신히 몸을 기댈 수 있을 정도의 언덕이다. 그나마도 흙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아 땅은 군데군데 물러있다. 앞으로 부단히 다지고 가꾸지 않으면 점차 더 크거 무거워질 아들이, 그리고 아내가 미덥게 기댈만한 언덕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언덕
모두가 언덕 하나씩 디디고 태어난다. 하지만 어떤 언덕은 사라지고 어떤 언덕은 작아지며, 어떤 언덕은 찾아와 기대는 이 없다. 어떤 언덕은 작지만 풍요롭고, 어떤 언덕은 크지만 황량하다.
모두가 되고 싶은 언덕 모양도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기대도 기대도 기댈 곳이 넘쳐나는 큰 언덕이 되고 싶어 한다. 어떤 이는 어디 한 군데 무른 구석이 없는 돌산처럼 단단한 언덕이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작거나 물러도, 아들과 아내가 자주 찾아와 조용히 누웠다 갈 수 있는 언덕이 되고 싶다.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부는 곳에 풀과 나무를 심고, 앉거나 누울 작은 지붕 있는 평상 하나 놓인 언덕이 되고 싶다. 이만해도 나로서는 할 일이 많다. 따뜻한 바람과 풀과 나무, 지붕 달린 평상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 여러 번, 깊이 생각하고 아들과 아내에게 행동해야 한다. 더 오래, 믿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한다.
그 나이 든 방송인의 말은 인상적이었다. 언뜻 가볍게 보일 수 있는 대화의 배경 속에서도 '수십 년간 묵묵히 가꿔온 언덕'이 슬쩍슬쩍 엿보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묵묵히 가꿔온, 늘 같은 자리에 있던 아버지라는 언덕이었다.
얼마 전 태어난 아들과, 아내에 대해 이어 씁니다.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아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