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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부 Jan 27. 2022

나는 구겨진 인간이야

구겨지는 순간으로부터  

학교에 상주하는 교사로서 모든 학교폭력의 장면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듯 그들이 구겨지는 순간으로부터 지켜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순간이 사실 더 많다. 비단 폭력의 상황이 아니어도 구겨짐의 이유는 늘 충분하니까. 나의 호의를 값싼 휴지조각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사람들로부터, 평등한 줄 알았던 공간에서 철저한 사회적 위계와 서열로 나를 값 매기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무심코 드러난 나의 치부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사람들로부터.


동료 교사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한 선생님이 그간 학교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번에 학교폭력이 연달아 두 건이나 생겨서 힘들었어요.” 

“아이고.. 어떡해요. 힘드셨겠어요. 잘 해결되었나요?” 

“네 잘 마무리는 되었어요. 00 선생님 반에서는 학교폭력 사건 없었나요?”

“네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없었어요.” 


학교폭력이 없었다는 나의 대답은 반만 맞고 반은 거짓말이다.       

전문용어로써 학교폭력이 가지는 특수성과 심각성과는 달리 실제 학교폭력의 순간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너 이거 학교폭력이야!”라고 말하는 순간마저 교내 폭력 담당 부서에 공식적으로 접수되지 않으면 단순 소동이나 소란으로 일단락되는 장면이 더러 있음이다. 아니 오히려 용어 사용으로 인해 자칫 피해-가해 구도를 규정해버릴까 염려되어 ‘학교폭력’이란 단어 자체도 함부로 내뱉기 어려워져 버린 실정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학교에서는 늘 매일같이 크고 작은 ‘학교폭력’ 사건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학교장 종결로 처리하게 돼서,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등의 이유로―생활 교육부 담당의 공식 학교폭력으로 접수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학교폭력의 순간이 괴롭고 힘들지만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순간이 있다. 몇 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피해 당사자는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천진난만하고 밝은 아이였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좋고 매 순간이 신나서 아무런 고민 없이 자신의 밝은 내면을 내비치는 아이. 그러나 그런 긍정을 나댐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누군가가 그 아이의 수치스러운 순간을 SNS상에 게시하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 범인은 곧 색출되었지만 그는 다름 아닌 평소 자주 연락하며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아이의 부모님께선 아이가 더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학교폭력으로 접수되는 것도 원치 않아하셨다. 상처를 준 학생도 깊이 반성하였고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친한 친구에게 느꼈을 배신감보다 마음에 걸리는 답변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마음 아프고 속상한 점은 뭐야?”

“............ 제가 다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은 거요.”     


학교도 사회도 때론 그런 공간이 되어버리곤 한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구겨지는 공간. 인간이 모두 빳빳한 종이로 태어나 구겨져야 하는 숙명이라면 아마 그 구겨지는 공간 1위는 학교가 아닐까 싶다. 모든 상처나 모멸. 수치, 창피, 배신이 ’ 구겨지는 순간‘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놀라운 회복탄력성으로 구겨진 마음쯤이야 금세 반듯하게 피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아가기도 하니까.      

'구겨지는 순간'이란 그 한계치마저 넘어버릴 정도로 무참히 구겨져서 도저히 필 수가 없는 순간이다. 세상에 처음 느껴보는 환멸과 깊은 배신감으로 마음속 어느 한구석이 깊이 뒤틀리며 내장이 모조리 꼬이는 그런 느낌. 인생의 어느 한 지점으로 인이 박혀 버려 예전의 나로는, 구겨지기 전으로는 도저히 돌아가지 못할 거 같은 그런 기분.


천계영 작가의 ‘좋아하면 울리는’이란 웹툰에 구겨짐에 관한 대사가 있다. 

“사람들이 와서 나에게 상처 주고 나를 구기고 발로 차고 그러면 내 모습이 일그러지잖아. 그러면 나는 자꾸만 펴는 거야. 나의 진짜 모습이 구겨지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 망가뜨린 모습대로 살지 않게. 원래 내가 되었어야 할 모습으로. 나는 구겨지지 않을 거야."      


그러나 구겨져 본 사람은 안다. 구겨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쉽게 구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풍파와 시련으로부터 자식을 지키려 애쓰는 부모도 내 자식의 구겨지는 순간만큼은 막기 힘들다. 든든한 형제자매도 오랜 친구도 나의 구겨짐을 막을 수 없다.       


학교에 상주하는 교사로서 모든 학교폭력의 장면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듯 그들이 구겨지는 순간으로부터 지켜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순간이 사실 더 많다. 비단 폭력의 상황이 아니어도 구겨짐의 이유는 늘 충분하니까. 나의 호의를 값싼 휴지조각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사람들로부터, 평등한 줄 알았던 공간에서 철저한 사회적 위계와 서열로 나를 값 매기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무심코 드러난 나의 치부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사람들로부터.     


그러니 이 산발적이고 충동적이며 비가역적인 구겨짐의 순간으로부터 막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 살아가는 것이 매일 조금씩 구겨지는 일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구겨져서 태어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건 당일 학교에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아이들이 찾아와 고하기를 우리 반 학생이 다른 반 학생과 시비가 붙어 다른 반 학생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반 아이가 피해 학생의 동영상을 조롱하고 다니는 것을 우리 반 아이가 막다가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그 아이는 피해 학생과 절친까지는 아니어도 같은 무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었다. 그 친구는 소수의 주도자와 다수의 무자비한 대중으로 변해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나서 피해 학생의 편에 서 준 한 사람이었다.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 같다던 그 아이는 나의 생각보다는 잘 지내주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모습을 금세 회복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아이가 사건을 깨끗하게 잊고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긍정적인 사람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슬픈 교훈은 얻지 말고 다시 원래대로 나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느 날 문득 그 사건이 떠올라 서러워진다면, 그래서 괜히 자신감을 잃고 어깨가 축 처지는 하루라면 그 순간 유일하게 나서서 자신의 앞을 지켜준 그 친구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내가 구겨지던 순간 함께 해주던 누군가의 작은 도움, 친절 용기, 손길. 나의 구겨짐을 막아주진 못했어도 다시 잘 피고 나아가도록 노력하게 도와준 사람들.      


구겨져본 사람은 안다. 구겨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니 단 한 번이라도 구겨져본 사람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구겨지는 순간을 함께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 순간 내미는 별 거 아닌 손길이 누군가의 평생을 지킬 정도로 얼마나 커다란 도움인지.  


빳빳하고 네모 반듯한 종이로 태어나 그렇게만 살다 가면 좋은 인생이겠지만 어렵고 힘든 삶이다. 나의 진짜 모습이 일그러졌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이제 구겨질 만한 일은 다 겪은 나이라 생각하지만 또 모르겠다. 사춘기라 더 힘들다는 변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질 날이 또 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겨짐이 숙명이라면 잘 구겨지고 싶다. 그리고 잘 구겨지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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