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을 재미있게 하고 싶다면
나의 아빠는 산을 사랑했다. 매 주말이면 인근 산을 오르고 계절 따라 전국 유명 산을 도는 등산광이었고 히말라야나 킬리만자로 등 높고 험준한 산도 거침없이 오르는 산악인이었다. 정작 어린 시절의 나는 아빠의 꼬임에 넘어가 따라간 새벽 산행의 고된 기억 이후로는 아빠 따라서는 산에 잘 가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코로나 시국까지 겹쳐 산을 자주 오르게 되긴 했지만 아빠처럼 산을 사랑하기는 힘들었다.
아빠는 등산 가는 날이면 소풍 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팔팔 물을 끓이고 계란을 삶았다. 냉장고를 뒤져 신선한 과일과 견과류를 챙기고 고심해서 컵라면을 골랐다. 한두 번 가는 등산도 아닌데 매번 처음 가보는 사람처럼 분주하고 정신없었다.
2022년 새해를 맞아 등반길에 올랐다. 몇 년 만에 단둘이 만나는 친구와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인왕산을 오르기로 했다. 인왕산은 여러 번 가보기도 했거니와 난이도도 쉬운 편에 속해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산이다. 오를 때마다 등산복도 없이 편한 옷에 운동화를 신고 오르는 곳이었다. 사실 내게 등산이란 빠르게 정상을 찍고 내려와 인근 맛집에서 모둠전에 시원한 막걸리를 기울이는 것이 진짜 목표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등산은 아빠처럼 해보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등산인의 마음으로 산행을 준비했다. 있지만 쓰지도 않던 전문 등산 가방에 등산 재킷과 등산화를 챙기고 단단히 채비했다. 전날부터 가방에 미니 돗자리와 물티슈, 손세정제, 핫팩 등을 챙겨 넣고 있으니 엄마가 누가 보면 한라산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며 웃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뜨거운 물을 끓이고 물이 식을세라 재빨리 보온병에 가득 담았다. 겨울 산의 정상에서는 어떤 향의 드립 커피가 어울릴지 고민하다 과일의 상쾌한 신맛과 초콜릿의 달콤함이 어우러졌다는 티백을 챙겼다. 적당한 반숙란을 만들기 위해 물이 끓기 시작할 때 맞춰 계란을 넣고 8분 타이머를 맞춰놓고 기다리자니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다.
아빠가 왜 그렇게 분주했는지, 왜 산을 처음 가는 사람처럼 동분서주했는지 알 것도 같다. 아빠는 늘 같이 가는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함께 챙겼다. 계란은 절대 하나만 삶는 법이 없었다. 도시락통에는 1인분 이상으로 음식을 담아 넣었고 과일이나 초콜릿도 필요 이상으로 챙겼다. 매번 산도 사람들도 달라지니 먹을거리도 달라져야 했고 아빠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아빠의 마음으로 등산을 준비하자니 어느새 내 등산 가방도 아기 배처럼 뚱뚱해졌다. 계란도 두 알, 사과즙도 두 개, 커피 티백도 두 개 컵라면도 두 개 종이컵은 네 개. 가볍게 오를 때는 산 입구에서 김밥 한 줄과 생수를 챙겨서 쫄래쫄래 들고 가는 게 다였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산을 오르며 쉬어가는 길목마다 친구에게 먹을거리를 건넸다. 친구도 마침 김밥을 두 줄 사 와서 한 줄을 내게 건네 나눠 먹었다. 우리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정상의 너른 바위에 앉아 김밥에 막걸리를 기울이며 짠했다. 차가운 막걸리가 더워진 몸을 식혀주었다. 아빠도 이런 재미로 산을 올랐겠지. 쉬어가는 길목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먹을거리는 꺼내 건네는 마음. 겨울바람이 차갑게 부는 산 정상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종이컵에 담는 소소함. 나란히 계란을 까서 어떤 계란이 맛있게 익었나 확인하는 재미. 빵빵하고 무겁던 가방이 산을 다 내려갈 때쯤 가볍게 홀쭉해지는 느낌.
생각해보니 친구와 서로에게 먹을거리만 건네고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거 치고는 장황한 근황 토크도 없었다. 그런데 긴 시간의 공백은 메워지고 나와 친구는 어느새 어제 본 친구처럼 편하고 익숙해졌다. 누군가와 산을 오른다는 건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은 친목 행위다. 그저 함께 힘든 길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백 마디 말보다 낫다. 그러니 산에서 나누는 기쁨이 평지보다 배가 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리라.
그러니 등산 바이블을 적어보자면 이렇다. 등산을 재미있게 하고 싶은 사람은 지금 당장 괜찮은 등산 가방을 사라. 기왕이면 가방 바깥으로 물병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가 달린 가방이면 좋다. (이곳엔 막걸리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아침에는 분주하게 가방 가득 먹을거리를 챙겨야 한다. 이때 미덕은 절대 동행인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 묻지 않는 것이다. 나는 계란을 삶아 올 테니 너는 주전부리를 가져오라고 하는 식의 역할 분배는 너무 뻔해서 재미가 없다. 숨이 턱끝까지 올라 쉬어가야 할 때쯤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는 동행인에게 깜짝 간식을 공개하는 즐거움을 뺏겨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산행길이 있었지만 내게 이번 인왕산 등산은 가장 기억에 남는 등산이 되었다. 인상 깊은 파트는 등산길 자체보다 아침에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을 쌀 때였다. 여행도 원래 여행 가기 전이 더 재밌는 법이다.
아빠와 함께 등산을 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지금쯤 아빠도 어디선가 높은 산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 산은 아닐 테고 저 멀리 처음 들어보는 높고 험한 산 어디쯤. 내가 아빠처럼 등산광이 될 거 같지는 않지만 나만의 등산 재미, 등산 바이블을 찾았다. 다음 등산엔 뜨거운 물에 담으면 오뎅 국물 맛이 진하게 우러나온다는 티백을 챙겨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