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생활 중 처음으로 학부모 공개수업을 했다. 6년간 요리조리 공개수업을 피했는데 이번에는 요행이 없었다. 3학년이니 많이 오시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공을 들여 평소답지 않은(?)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피피티와 풍부한 자료, 여러 가지 활동을 준비했다.
‘벌써 7년 차인데 떨리긴 뭐가 떨려’
허세 섞인 말과는 달리 전날 예행연습까지 마치고 활동 시간과 설명 포인트, 크롬북 사용 시간까지 적당히 계산한 뒤 평소보다 일찍 교실에 와 아이들을 정돈시켰다. 아이들은 새로 뽑은 자리 배치가 수업 분위기에는 좋지 않았다고 말하며 미리 수동 배치를 권했고, 나는 영어가 약한 몇몇 아이들과 잘하는 아이들을 미리 짝으로 배치해놓으며 '이 정도면 완벽하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수업은 원만하게 흘러갔다. 도입은 gap 활동부터 시작했는데, 짝끼리 마주 보고 앉아 서로 다른 곳에 빈칸이 뚫린 종이를 받은 뒤 문장을 읽어 완성하는 간단한 활동이었다. 아이들은 착하게도 열심히, 큰 소리로 문장을 읽으며 과제를 완성했고 나는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활동 상황을 점검했다.
문제는 gap활동이 끝나가는 시점에 있었다. 보통은 10분 안에 끝나는 활동인데 그 반에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 한 명과 기초 회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영어를 아주 못하는 학생이 두 명 있다. 셋 모두 열심히는 하지만 영어 발화 속도가 현저히 느리고, 받아 적는 것도 오래 걸린다.
문제는 그 반 아이들이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 차분했다는 것. 보통은 먼저 과제를 마친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지기 때문에 뒤늦게 끝내는 아이들도 그다지 티가 나지 않고, 아이들도 스스로의 과제 수행 속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그런데 뒤에 서 계신 엄마아빠를 의식한 탓일까. 아이들은 과제를 마치자마자 무섭도록 조용해지며 나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까지 정돈된 수업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나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한 팀 한 팀 과제를 마치고 어느덧 조용해진 교실에는 과제를 반도 끝내지 못한 그 아이들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리기 있었다. 사전에 짝으로 붙여준 잘하는 아이들이 그 아이들을 도와주긴 했지만, 속도는 평소보다도 턱없이 느렸고, 그걸 인식한 나머지 목소리조차 점점 가느다랗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다가가서 조금 도와주었지만 오히려 모두의 시선을 집중 시키는 역효과만 났다. 점차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와 알아듣기 위해 애쓰는 짝을 보니 내가 다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결국 그 아이들이 못한 부분은 잠시 두고 다음 활동으로 넘어갔다. 학습지를 많이 채우지 못한 것이 멀리서 보아도 티가 날 정도였지만, 억지로 기다리는 것은 모두에게 고역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준비한 크롬북 활동은 낙오자 없이 모두가 즐겁게 참여했지만 중간중간 준비한 퀴즈에서 다시 한번 아이들의 실력 차이가 두드러졌다.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너도 나도 손을 들었지만 그 세 명의 학생들 만큼은 단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쉽게, 무조건 맞추는 것만 준비할걸이라는 후회가 들었다. 오늘 따라 왜 이리 못하는 아이들이 위축되어 보이는 것일까. 평소에는 아무 말이나 잘하고, 늘 몰라도 개의치 않고 번쩍 손을 들어서 때론 나를 곤란하게까지 하던 친구들인데 말이다. 잘하는 아이들은 평소보다 더 신나고 못하는 아이들은 더욱 기가 죽는 수업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래저래 수업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자니, 아이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교실 뒤편, 아직 나가지 않고 서성거리는 어머니들이 보였지만 그분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이들하고만 말을 했다. 부모님께서 참관을 했던 아이들이 내게 와서 뒤에 엄마가 있었다며 티를 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아이 중에 아까 그 세 명 중 한 명의 아이도 있는 것이 아닌가. 본인 바로 뒤에서 수업을 지켜보던 분이 실은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아뿔싸, 싶었다. 아이가 수업시간에 한 마디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엄마가 뒤에서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미리 알았더라도 뾰족한 수가 있었을지 싶지만, 뭐라도 더 힌트를 주고 도와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홀가분함 보다는 찝찝한 마음으로 교무실에 내려와 수업을 돌아보았다. 초반에 과제를 완성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맞았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그 어머니는 느리더라도 끝까지 완주하는 아들을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창피해질까 봐 다음 활동으로 넘어갔다지만 실은 야심 차게 준비한 다음 활동을 보여주고 싶은 나의 개인적인 욕심이 섞인 것은 아닌가? 오늘 내가 한 수업은 누굴 위한 수업이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했다.
내일부턴 좀 더 기다려줘 봐야지. 빨리 끝내고 이제 뭐해요? 하는 아이들에게 대답하느라 버벅거리며 뒤처지는 있는 아이들을 흘려보내고 있던 것은 아닌지. 아무리 틀려도 또 손을 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수업은 어떤 것인지. 모두를 위한 수업은 또 무엇인지.
정답이 없는 수업시간. 정답이 없는 고민만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