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벌레 Jul 27. 2021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안정효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하는    되게 해 주세요." 소원  일이 많아지는 연말연시에 뉴스 인터뷰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나도 생일 케이크 촛불을  때면 그런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일이  풀리기만 하는 행복한 세상이 오면 어떻게 될까? 혹은 반대로, 어떻게 하면 그런 세상이 올까?  질문에 대한 당황스러운 대답을 <멋진 신세계>에서 들었다.


책의 배경이 되는 '세계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도록 세뇌당하는 유년 시절을 거쳐, 정해진 직업과 계급에 순응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가질  있는 것만 원하도록 세뇌당했으니 부족을 느낄 일도 없다.   


완전히 행복하다는 결론만 보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진  틀림없다. 물론 방법이 무시무시하게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긴 하지만, 저렇게라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비난할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옳지 않다'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것은 자유는 없고 행복만 존재하는 세계가 정말로 옳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역시 자유의 중요성을 세뇌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하지만 자유, 도덕, 윤리를 모두 배제하더라도, <멋진 신세계> 그리는 불행 없는 세상에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있다. 불행 없는 삶이란 말이  시들지 않는 꽃처럼 들린다. 그것은 또한 '성공한 사람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보여  , 오직 즐거운 순간으로만 채워진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때도 느끼는 불편한 감정과 비슷하다.  역시 내가 삶은 슬픔이 있기에 아름답다던가,    땅이 굳어진다던가 하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런 세상에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아온 나는 <멋진 신세계> 완벽한 행복보다는 불행과 행복이 뒤섞인 삶이  '옳다' 생각이 든다.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렇다면 나에게 유토피아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불행을 받아들일 줄도 아는 인생일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유토피아라는 말이 주는 비현실적인 느낌과도 어울린다.

 <멋진 신세계>에는 정말 멋있는 문장이 많다. 여기저기서 내가 바로 명대사야! 하고 외치고 있다. 한데 나는 그에 비하면 무척 소박한 장면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책의 주인공 '버나드' 마지막에 세계국,  문명 세계에 살기 적합하지 않은 자로 판단되어 아이슬란드로 보내지는데, 결정권자에게 울며 불며 매달리면서 모든  친구들의 잘못이라고,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지 말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그는 추방을 피할  없었고, 다음날 아이슬란드로 떠나기 전에 '자포자기한 새로운 표정'으로 친구를 찾아와 작별인사와 사과를 한다.   

"어제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하는지를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그는 얼굴을 붉혔다. "너무나 창피합니다." 목소리가 갈팡질팡하는데도 그는 말을 계속했다.

자신의 불행에 발버둥 치다가 결국 받아들이고, 빨개진 얼굴로 잘못을 사과하는 주인공.  모습이 내가 꿈꾸는 '불행을 받아들이는 '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눈앞에 완전히 행복한 삶을 시작할  있는 버튼이 나타난다면 그걸 누르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5월에 읽은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