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도피

by 도담도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나의 생활은 매우 방탕했다. 과거형으로 썼는데 현재 진행형으로 방탕하다. 물론 일은 열심히 한다. 번역은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일 이외에는 그야말로 방탕함 그 자체로 보내는 중이다.

요즘 내 하루는 잠-일-덕질-잠-일-덕질인데, 시간을 정확하게 정해놓지도 않았다. 원래도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그래도 그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을 규칙적으로 했는데, 지금은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을 불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어떨 때는 오후 4시에 일어난 적도 있다. 늦게 일어나면 머리가 무거워서 하루가 그냥 날아가는데도 몸이 일어나질 못한다. 아무리 해이해져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1년 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고 마음 정리도 했으며 요양병원에 계셨으니 집에 할머니가 안 계신 것은 똑같은데도 요즘 내 몸은 상당한 부하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부하를 견디다 못해 내 정신이 지금 같은 도피를 선택했나 보다. 잠과 일과 덕질로의 도피. 일이야 뭐 원래 해야 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 변명일 것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경험을 나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성격이나 관계에 따라서 당연히 다르겠지만, 할머니를 잃은 사람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멀쩡하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만 이상하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친구와 카톡을 하고 만나고 웃고 떠들고, 평소처럼 당연하게 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왜 내 삶이 예전과 똑같지? 할머니가 안 계신 세상에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지? 할머니 보고 싶다. 그냥 잠이 든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

이렇게 사고가 이어지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뻔한 소리지만 마음에 구멍이 뻥 뚫려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거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할머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갑자기 찾아온 덕질을 지푸라기처럼 붙잡았다. 내가 봐도 이 덕질은 비생산적이다. '덕질이 과연 생산적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겠지만, 꽤 오랜 세월 해 온 그 사람 덕질은 최소한 나에게는 지극히 생산적이다. 그런데 지금 이 덕질은 아무리 따져 봐도 비생산적이다. 잔다고 누워서 새벽 5시, 6시까지 새로 올라오는 것도 없는 커뮤니티를 동태 같은 눈으로 들여다보다가 기절하듯 잠드는 것이 생산적일 리가 없다. 그런데 덕질이 굳이 생산적이어야 하는 이유도 없다. 삶의 행복이든 활력소든 혹은 도피든, 잠깐이라도 매달릴 수 있다면 상관없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매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산적이지 않을까.

이런 출구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그래도 이왕 하는 미국인 덕질이니 영어 공부라도 할까 보다. 그러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낭비했다는 생각은 안 들겠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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