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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도담 Jun 26. 2020

뚱뚱한 김밥 데굴데굴

한 끼 식사와 차곡차곡


오랜만에 김밥을 먹었다. 그 이름도 있어 보이는 점보 김밥. 

모 김밥 체인점 창문에 인기 재료들(새우, 돈가스, 햄, 참치)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먹을 것에 약하고 새로운 것은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그냥 지나갈 수가 없지. 


가격은 5,500원이었다. 천 원 지폐 한 장으로는 편의점 김밥도 못 먹는 세상이지만(먹을 수 있나요?) 한 줄에 5천 원이 넘다니, 가격을 보고 솔직히 식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새우, 돈가스, 햄, 참치를 따로따로 먹으면 당연히 5천 원을 훌쩍 넘긴 한다. 애초에 네 개를 따로따로 시키면 한 번에 다 먹지도 못하니까 논외긴 하다.

보통 하나만 들어가는 핵심 재료를 네 개나 넣으니 김밥 크기도 클 것이다. 잠깐 고민하는데 직원분께서 안 그래도 지금 먹는 중이라며 접시를 보여주셨다. 역시, 예상대로 굵직한 것이 한 줄을 혼자 다 먹기도 벅찰 것 같았다. 

아아, 소싯적에는 참치김밥 한 줄에 치즈김밥 한 줄쯤 뚝딱 먹었고, 꼬마김밥을 처음 먹고 반했을 때는 그 자리에서 열 개를 먹고 열 개를 포장해온 적도 있건만! 이젠 김밥 한 줄로도 배가 차는 슬픈 위장의 소유자가 되어 버렸다. 


직원분이 바쁜 손길로 김을 펼치고 위에 밥을 펼쳤다. 속 재료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인지 밥의 양은 다른 김밥보다 적어 보였다. 아니, 5천 원이 넘는데! 밥알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꽁해진 것도 잠시, 각종 채소가 수북이 올라가고 핵심 재료와 마요네즈(또 뭐 하나를 더 뿌렸는데 뭔지 모르겠다)에 마무리로 깻잎까지 올라가자 김 위는 그야말로 잔칫상이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서른몇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김밥을 싸본 적이 없다. 어려서 엄마가 쌀 때 옆에서 얼쩡거리며 김발을 대충 굴려본 적은 있지만, 내가 굴린 김밥은 엄마가 한 번 더 꼭꼭 눌러야 했다. 안 그러면 썰 때 다 터졌거든. 

세상사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우물 안 개구리인 나는 저 두툼한 김밥이 과연 잘 말릴까 걱정됐다. 옆구리가 터져도 재료 맛이 떨어지진 않으니 맛이야 똑같겠지만 이왕이면 예쁜 김밥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지, 직원분이 김발을 둘둘 말아 살짝 눌렀다가 떼자 노란 김발 너머로 동글동글한 까만 김밥이 짠 나타났다.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란! 옆에서 지켜보는데 저렇게 동요하지 않고 일에 몰입할 수 있다니 감탄스럽다. 관심종자이면서 소심한 나는 시선이 느껴지면 혼자 긴장해서 괜히 마른침을 삼키고 안절부절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남이 일하는 모습은 빤히 지켜보는 이런 앞뒤 안 맞는 성격 같으니. 


동글동글 탄탄한 김밥은 곧 어떤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참기름을 바르거나 깨를 뿌려주는 기계인 줄 알았는데 웬걸, 김밥을 써는 기계였다! 직원분이 손을 쑥 올렸다가 내리자 김밥이 고른 간격으로 썰려서 나왔다. 

세상에나! 김밥 써는 기계나 사과 깎는 기계가 존재한다는 풍문은 들었는데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겨우 2년쯤 전문점 김밥을 안 먹었다고 세상이 이토록 진보했을 줄이야.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반드시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뼛속까지 문과에 아날로그한 인간이지만 앞에서 이런 신기술이 펼쳐지면 감탄이 나온다. 썰어주는 기계가 있다면 나도 김밥을 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밥집에서 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잠깐 희망을 보았으나 마는 걸 잘할 수 있을까. 다시 시무룩해졌다. 


김밥 한 줄 달랑 든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에 돌아와 길쭉한 접시에 올려 보았다. 원래는 대충 종이를 벗겨서 우적우적 먹는데 처음 먹어보는 것이니까 사진을 찍고 싶었다. 이런 관종. 


맛은 그냥 평범한 김밥 맛이었다. 김밥에서 케이크 맛이 나길 바란 것은 아니니 본질에 충실한 맛이었다. 다만 네 가지 맛이 동시에 나니까 혀 위에서 자기들끼리 탭댄스를 추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막춤으로 끝나는 기분? 모두 맛있는 재료지만 한꺼번에 넣는다고 꼭 맛이 네 배가 되진 않았다. 굳이 또 먹고 싶진 않지만 재미 삼아 한 번은 먹어볼 만했다. 


오늘 새로운 먹거리 도전은 백 점 만점에 칠십오 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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