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비활동적이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을 미덕을 알고 사는 집에서 일하는 번역가인 나는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다.
잠에서 깨면 한참이나 꿈지럭꿈지럭 폰을 들고 여기저기 집적대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으면 책상다리하고 앉는다. 명상을 하는 건지 '엄마 5분만 더'를 하는 건지 모를 의식을 치른 뒤, 부엌으로 비척비척 가서 물을 한 모금 꿀꺽한다.
다음에는 대충 고양이 세수-라고 하면 고양이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디 깔끔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양이에 나를 비유하는가!-를 하고 여전히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독서대에 번역 중인 책을 펼치고 노트북에는 일하는 중인 파일을 띄우고 곧바로 일에 돌입...한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그럴 리가 있나.
우선 메일부터 접속해서 '어찌하여 오늘도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는가!' 하고 반쯤 울먹이듯 외친 후 일에 돌입...한다면 아이쿠야 훌륭하지.
트위터부터 시작해 온갖 덕질용 사이트를 집적이다가 하룻밤 사이에(보통 새벽 2시까지 폰을 쥐고 있으니까 약 6~7시간 사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서야 일에 돌입한다.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지인을 만나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하다못해 택배 발송하러 우체국에 가는 일정이라도 없는 한은 그대로 앉아서 일하다가 잠깐 덕질하다가 일하다가 잠깐 흘러 흘러 인터넷 세상을 떠돌다가 일하다가 잠깐 생각났다는 듯이 도수 치료사가 하라고 한 등 펴기 운동 좀 해주고 일하다가...를 무한 반복한다.
일과 놀이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줄타기하다가 대충 오후 7시쯤에는 일을 마친다. 지금은 마감 때가 아니어서 비교적 여유가 있다. 시간에는 여유가 있고 마음은 '아아, 다음 일감...!' 하고 불안한 그런 때랄까. 들을 강의가 있으면 그대로 앉아서 강의를 듣고, 넷플릭스에 접속해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하는 초기 화면과 눈싸움을 한다. 몇 주 전부터 배우에 '입덕'한 주인이 영상 돌려보느라 바빠서 내 노트북은 고생 중이다.
간혹 도저히 집중이 안 되는 날은 노트북을 짊어지고 집 앞 마트의 스타벅스에 가기도 한다. 요즘은 시국이 시국이기도 하고 리모델링한 후로 이상하게 와이파이가 자꾸 끊어져서 발길이 멀어졌다.
앉아서 뭉개지 말고 빨리빨리 마시고 꺼지라는 스타벅스 측의 의도일까(매우 음모론).
오늘은 어떤 날이었을까.
몇 주 전에 얘기가 있었던 번역 계약에 진전이 있었고, 며칠 전에 아마존 저팬에서 발견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 간단히 정리해서 검토해보고 싶다고 제안한 책에 관한 답 메일을 받았으며, 몇 달 전에 꼭 번역하고 싶어서 열렬히 어필했던 책의 판권이 다른 출판사에 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일 마지막은 아쉬운 소식이고 앞의 두 가지는 기쁜 소식이라고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셋 다 기쁜 소식이다. 앞의 두 가지야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도 몇 달간 애태웠던 결과여서 속이 시원하다. 아쉬워서 조금 눈물이 나긴 했지만 다른 훌륭한 번역가의 손길을 거쳐 나온 책을 편하게 볼 수 있으니까 슬픈 일만은 아니다.
아니, 뭐 솔직히 마음에 쏙 든 책이어서 아쉽긴 하다. 아주 많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결정됐는데 주먹 물고 읍읍 운다고 나한테 오는 것도 아니고. 힝.
오늘처럼 번역이나 검토 의뢰가 들어오거나 출판사 대표님이나 편집자님이 카톡 혹은 문자로 연락을 주시는 날은 특이한 날이다. 아직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번역가다 보니 별표 치고 밑줄도 쫙 그을 날이다. 의젓하게 답을 쓰고는 엄마한테 뿅뿅 달려가서 일 들어왔다고 있지도 않은 꼬리를 살랑살랑 치며 흥분해서 날뛰는 그런 날.
오늘 같은 날이 매일 매일 있으면 내 몸이 감당을 못하겠지만 가능하면 자주,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6월 25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