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품은 빈자리
책상 위에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자리,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했다.
색연필이 지나가면 종이는 가늘고 선명한 선을 품었다.
빨강, 파랑, 초록… 색이 얹힐 때마다 종이는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였다.
크레파스가 스치면 종이는 거칠고 두터운 흔적까지 안아 주었다.
부러진 조각, 삐뚤빼뚤한 선도 종이 위에서는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심지어 지워진 자국, 찢긴 상처조차 종이는 외면하지 않았다.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더 넓은 마음을 보여 주었다.
밤이 되자, 종이 위에 남은 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꽃이 피고, 파도가 일렁이고, 무지개가 하늘에 걸렸다.
종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위에서 세상이 살아났다.
아침이 밝았다.
책상 위 종이에는 알 수 없는 풍경이 완성돼 있었다.
내가 그린 적 없는 그림이었지만, 그 안에는 웃음과 노래가 가득 담겨 있었다.
※ 작가의 말
종이는 늘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지워진 자리, 삐뚤어진 선조차도 결국 또 하나의 이야기로 남습니다.